한국인의 터전: 미주 편

미주 한인사회의 통합과
대한인국민회 결성

미주 한인사회의 통합과<BR />대한인국민회 결성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미주 한인사회의 통합과
대한인국민회 결성


  

1908년 미주 한인사회에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처단의거와 덴버의 북미애국동지대표회로 국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전개될 때 미주 한인들은 내부의 결속과 통합에 전념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합성협회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고, 그 이후 전 미주 최초의 통합 단체인 국민회 탄생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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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성협회장정

하와이 최초의 통합 단체 합성협회의 결성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던 하와이 한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단체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07년까지 25여 개의 각종 단체가 우후죽순 만들어져 제각기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하와이 한인들은 대한제국이 최초이자 마지막인 헤이그 특사 파견을 통한 국제외교를 시행한 후 그 일로 광무황제가 일본 정부의 압박으로 강제퇴위되는 상황을 보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7년 8월 하와이 24개 단체 대표 30명은 호놀룰루에서 5일간 대표대회를 열었다. 하와이 한인사회가 지금의 분산된 상태로는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향후 활동을 개척해 나가기 위함이었다. 절박한 시국상황 속에 개최한 한인 대표대회는 마침내 1907년 9월 1일 합동발기문을 발표하였다. 하와이 이민사회 최초로 통합 단체인 합성협회(合成協會)를 탄생시킨 것이다.

합성협회취지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설립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지금의 시국상황은 도저히 참기 어려운 지경이니 우리 한국인(韓民)이 스스로 독립정신으로 생존을 지키기 위해 모든 단체들이 일치단결해 하나의 단체인 합성협회를 만드니 이 단체를 통해 국권을 만회하고 동포의 환난을 구제하고 교육에 힘써 문명독립을 이루려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합성협회는 설립 목적을 “포와 동포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합심 협력하여 환난을 상구(相救)하며 교육을 발달케 함”으로 정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치, 종교, 지위, 직업을 막론하고 국민된 의무를 지키고 일치단결하여 학업과 동포의 공익을 위해 힘을 다하는 것으로 정했다.

합성협회의 초대 총회장은 임정수가 맡았고 정원명이 그 뒤를 이었다. 부총회장은 안원규를 필두로 이내수가 이어 갔다. 설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합성협회는 하와이 전체에 47개 지방회가 설립되었고 회원 수는 1,051명이나 되었다. 이는 성인 전체 3,800여 명 중 거의1/3에 육박하여 하와이 한인들의 호응도는 매우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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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임원진(1909)



미주 한인사회 최초의 통합 단체 국민회의 탄생

하와이에서 통합 단체인 합성협회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북미의 한인들은 그동안 별 움직임이 없었다가 1908년 3월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의거를 계기로 하와이의 한인들과 공동 활동을 전개하면서 합성협회와의 통합을 모색하였다. 무엇보다 항일역량을 집중할 필요성이 크게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적극 추진한 단체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공립협회였다.

공립협회는 하와이 합성협회와 적극적인 통합을 시도하여 1908년 10월 23일 마침내 양측 대표자를 통해 합동발기문을 기초하고 11월 30일 이를 발표하였다.


“우리의 국권이 쇠퇴한 원인을 살펴보면 정부는 당파와 알력이 심하여 국가에 충성하지 못하였고 백성은 전제정치에 눌려서 규합되지 못한 까닭이며 이것을 뉘우치는 오늘에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마음을 합하고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조국의 운명이 위태한 이때를 당하여 해외 동포가 사방에서 부르짖는 것이 단체 합동과 역량 집중이며 미주와 하와이 단체들의 합동 추진이 우리의 급선무이다.”


이상의 합동발기문을 통해 공립협회와 합성협회는 자체 조직을 해소하고 합동한 후 새로운 통합 단체로 국민회를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합동 일자는 1909년 2월1일로 정했다. 이로써 1903년 1월 13일 한인들이 하와이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그동안 하와이와 북미에서 한인사회를 형성하며 독자활동을 전개하던 미주 한인사회에서 처음으로 양 지역을 통합한 새 단체로 국민회가 탄생하였다. 합동 발기에 참가한 인물은 합성협회에서 고석주, 김성권, 민찬호, 이내수, 강영소, 한재명, 안원규 등 7명이고 공립협회는 최정익, 이대위, 강영대, 안석중, 황사용, 이경의 등 6명이다.

국민회는 설립 목적을 “교육과 실업을 진발하며 자유와 평등을 제창하여 동포의 영예를 증진케 하며 조국의 독립을 광복케 함”에 두었다. 합성협회에서 제기된 조국 독립과 교육 진흥 외에 실업 방면을 새로 추가한 것이었다.

국민회가 조직되자 공립협회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초대 총회장 정재관)로, 합성협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초대 총회장 이내수)로 바뀌었다. 본부 조직으로 중앙총회를 두어 양 지방총회를 통할하게 하였고 지방총회 아래에 지방회를 두었다. 이에 따라 합성협회에서 발간하던 『한인합성신보』는 『신한국보』로, 공립협회의 『공립신보』는 『신한민보』로 각각 그 이름을 바꾸어 발행하였다.

1910년 2월 10일 하와이와 북미에서 독자활동을 하던 전흥협회와 대동보국회가 새로 국민회에 합류하자 기존의 국민회의 이름을 대한인국민회로 바꾸었다. 이로써 미주 한인사회는 1921년 하와이지방총회가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으로 변경해 대한인국민회에서 떨어져 나갈 때까지 대한인국민회의 기치 아래 하나로 통합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미주 한인사회의 통합 단체로만 조직되거나 활동하지 않았다. 공립협회 때부터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지방회 설립을 추진한 영향으로 대한인국민회는 북미와 하와이 외에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지방총회를 설립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4개의 지방총회와 116개의 지방회를 거느린 역대 최대의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또 국망 이후 사실상 가정부(假政府)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미주 한인사회를 지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