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숨결

봄에 취하다

천년고도 경주

INPUT SUBJECT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봄에 취하다

천년고도 경주


  

봄볕에 고양이처럼 축 늘어진 시간의 흔적들. 볕은 따습고, 바람은 훈훈하다. 4월 어느 날, 경주는 봄기운으로 충만하다. 꽃비가 휘날리는 봄날이다. 천년고도 경주는 예나 지금이나 봄나들이 명소로 손꼽힌다. 특히 요즘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미세먼지를 피해 한반도 동쪽에 자리한 경주에 여행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른바 ‘미피족(미세먼지를 피해 떠나는 사람들)’이다. 시야가 탁 트인 맑은 봄날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경주로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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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보문호의 낭만을 더하는 오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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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 담장에서 여행을 기록하는 여행자



경주 보문호, 아름다운 봄을 예찬하다

경주는 낯설지 않은 곳이다. 수학여행·소풍·MT·수련회·신혼여행 등 경주를 여행했던 이유는 세대·성별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그래서일까, 경주에 발을 디디는 순간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크고 작은 기억의 편린들이 퍼즐을 맞추듯 멋진 집으로 완성된다. 그것이 아름다운 추억이든 그렇지 않든, 경주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새로운 봄을 선사한다. 1998년에 개봉했던 영화 <해피 투게더>는 당시 역대급 스타였던 장국영, 양조위가 주연해 화제가 되었다. 영화의 원제는 ‘춘광사설(春光乍洩)’이다. ‘잠깐 비치는 봄 햇살’을 뜻한다. 영화가 담고 있는 참 의미는 ‘사랑은 인생에서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 햇살처럼 지나가 버린다’라는 메시지이다. 봄 한가운데 있지만 너무나 짧아서 깨닫지 못하다가 뒤늦게 봄이 지나갔음을 눈치채듯, 사랑받을 때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랑이 떠나갔을 때 아쉬워하는 게 인생인 것이다.

산수유꽃이 겨울과의 이별이라면, 벚꽃은 봄꽃의 대명사이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보문호는 2015년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됐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하는 최고의 영예를 거머쥔 것이다. 경주의 대표적인 관광단지라는 점에서 솔직히 늦은 감이 있다. 보문호는 경주에서 대릉원 주변과 함께 봄을 만끽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호수에는 바람이 강해 분홍빛 꽃송이가 눈발처럼 휘날린다. 보문호를 찾는 사람들은 해마다 다르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다. 보문호를 유유히 오가는 오리배와 아름드리 벚나무가 그렇다. 보문호 전 구간에 자전거 라이딩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총거리 6.1km에 이른다. 이 중에서 현대호텔·콩코드호텔·조선호텔을 잇는 3.2km의 코스는 호수를 따라 이어진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고 자전거 전용도로여서 안전하다. 자전거는 보문호 관광단지 상가에서 빌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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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하게 조성된 대릉원 소나무숲



한철 꽃보다 사철 소나무가 매력적인 대릉원

보문호에서 10km가량 떨어진 대릉원은 경주 고분군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넓다. 공원처럼 잘 조성된 능원을 따라 곱게 핀 벚꽃도 아름답지만 하늘을 덮을 정도로 무성한 소나무도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여행자들이 쉼과 여유를 챙길 수 있어 좋다. 숲이 깊은 탓에 나무 밑동 주변에는 아직 봄기운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길섶에는 봄의 울림이 전해진다. 산책길을 걷노라면 소나무의 위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마치 호위무사의 보호를 받으며 걷는 기분이랄까. 대릉원 깊숙이 들어가면 소나무가 비켜서고 매화나무, 산수유나무, 벚나무가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다. 곧이어 하늘이 열리고 나지막한 기와 담장 뒤에 곤히 잠든 것처럼 보이는 능이 보인다. 신라 제13대 왕인 미추왕릉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왕은 재위 23년 만에 대릉에 장사지냈다’ 하였다. 그래서 이곳을 ‘대릉원’이라 부른다. 대릉원의 주인이 미추왕인 것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는 이곳을 ‘죽릉’ 또는 ‘죽장릉’이라 불렀다. 이곳에 유독 대나무가 많은 이유가 그 때문이다. 미추왕릉을 지나면 발굴 당시 금관과 천마도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던 천마총이 기다린다. 대릉원을 거닐다 보면 ‘공원 산책을 온 게 아닌가?’하고 착각할 수 있는데 천마총은 내부를 관람할 수 있어 그런 생각을 일소한다. 내부에는 천마도를 비롯한 다양한 부장품들이 전시돼 있다. 지난해 여름에 재개관한 덕분에 전시기법이 앞서간다.
대릉원을 벗어나 내남네거리에서 황남파출소 방향으로 경주의 핫 플레이스 황리단길이 이어진다. 이 거리는 불과 2년 전만 해도 문화재 보존지역으로 묶여 건물의 증·개축이 어려웠다. 그런 탓에 점집이 난무하던 경주의 대표적인 낙후지역이었다. 그러다가 옛 건물은 그대로 유지한 채 개성 넘치는 카페와 음식점, 공방 등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경주의 새로운 명물 거리로 자리 잡았다. SNS에 소문난 곳으로는 오픈 전부터 줄 서서 기다리는 ‘기와양과점’, 외국인들의 입맛을 놀라게 한 ‘987
PIZZA@BEER’, 이색기념품을 판매하는 ‘배리삼릉공원’, 한복대여점 ‘경주한복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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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건축의 정수,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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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반월성과 첨성대 앞에 조성된 꽃밭과 능들



봄꽃 따라 흐르는 소경

황리단길을 벗어나면 화사한 꽃들이 물 흐르듯 느린 풍경을 자아낸다. 발걸음은 온화한 봄날의 소경들을 따라 이어진다. 첨성대 주변에는 샛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첨성대를 가리켜 ‘우주를 향한 신라인의 창’이라 부른다. 즉 신라인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이 응집된 건축물이란 뜻이다. 옛 신라인들은 첨성대에서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국운을 점쳤으리라. 그것은 우주를 향한 동경이었을 수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수도 있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우주에 대한 호기심이 아닐까.

내친김에 계림을 거쳐 반월성까지 돌아본다. 향긋한 유채꽃 향이 벚꽃 향과 버무려져서 봄기운을 돋운다. 계림은 왕버들, 느티나무 등 고목이 울창한 숲이다. 원래는 시림(始林)이라 하였으나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이 숲에서 태어날 때 ‘숲에서 닭이 알렸다’라고 해 계림(鷄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숲을 나서면 오른쪽에 토성으로 지어진 반월성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파사왕 22년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성을 중심으로 궁전이 자리했다지만 지금 남은 것은 조선 시대에 축조된 석빙고뿐이다.

가파른 비탈을 내려서면 국립경주박물관에 닿는다. 외관에서 신라 화랑의 기백이 느껴진다. 흔히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신종도 여기서 볼 수 있다. 실내에 전시된 유물들 역시 허투루 볼 게 아니다. 천년왕국이니 그 속에 감춰뒀던 역사가 얼마나 많겠는가. 국보와 보물을 챙겨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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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궁과 월지는 주경보다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낮과 밤이 다른 신라의 봄

천년을 이어온 왕실의 권위는 밤에도 불을 꺼트리지 않는다. 동궁과 월지는 해 질 녘에 찾아야 제격이다. 흔히 동궁과 월지를 ‘안압지’로 알고 있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다. 안압지(雁鴨池)는 신라 멸망 이후 시인 묵객들이 폐허가 된 연못을 보며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라며 시를 읊음으로써 기러기 ‘안(雁)’자와 오리 ‘압(鴨)’자를 써서 ‘안압지’라 부른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80년 월지표시 토기 파편이 발견된 이후 2011년부터 동궁과 월지로 이름을 고쳐 부르고 있다. 쇠락과 폐허의 상징이었던 곳이 다시 부흥의 역사를 맞은 셈이다.

동궁과 월지는 물 흐름을 따라 걷는 게 좋다. 매표소를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은 뒤 물길을 따라 걸어가면 된다. 졸졸졸 흐르던 물은 월지에 담겨 새로운 세상과 조우한다. 고즈넉한 야경은 호수에 그림자를 만들고 작은 바람에 일렁인다. 조명이 변할 때마다 연못의 색도 따라 변한다. 낮과 밤이 다른 신라의 봄은 그렇게 깊어 간다.

한편, 대릉원 일원에서는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비단벌레 전기자동차가 운행 중이다. 계림·최씨고택·교촌마을·월정교·꽃단지 등을 경유해 약 2.9km를 돌아본다. 걸음이 불편한 어르신들과 아이들에게 권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