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재외동포
독립운동의 터전을 일구다

재외동포 <BR />독립운동의 터전을 일구다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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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터전을 일구다




19세기 이래 많은 한국인이 기회의 땅을 찾아 만주로, 미국으로, 연해주로 떠났다. 그들은 이역만리에 살면서 자발적 결사체를 만들고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0년대에 북간도에서는 간민교육회와 그것을 발전시킨 간민회, 서간도에서는 경학사와 그것을 계승한 부민단, 연해주에서는 권업회, 미국에서는 대한인국민회 등이 자치를 도모하며 독립운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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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민교육회 제2회 교원강습회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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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만주 유하현 삼원보



만주, 무장투쟁의 배후지

만주로의 이주는 19세기부터 시작되었다. 1910년대에는 만주 이주가 급격히 늘었다. 1912년에 약 24만 명이 만주에 살고 있었는데, 7년 만인 1919년에는 43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만주에 몰려든 한인들은 마을을 이루고 한국적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고국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살았다.

북간도에서는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1910년 북간도 한인의 자치와 경제력 향상을 도모하고자 간민자치회를 결성했다. 중국 관리의 요구로 ‘자치’를 빼고 이름을 간민교육회로 바꾼 뒤에는 중국 관청의 허가를 얻어 합법적으로 활동했다. 간민교육회는 북간도 각지에 지회를 두고 도로와 위생 사업을 전개하고 농촌 경제 활성화를 위해 식산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한인으로부터 교육 회비를 걷어 명동학교 등을 운영했다. 기관지인『교육보』를 발행했으며 야학을 열어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했다.

1913년 4월 간민교육회가 간민회로 개편되었다. 간민회는 국자가에 총본부를 설치한 후 연길현·화룡현·왕청현 등에 지방총회를 두었으며 지방총회 산하에는 지회를 설치했다. 간민회는 중국 관리가 한인에 관한 행정을 처리할 때 협의기구 역할을 하면서 세금 징수, 호구조사 등의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위안스카이 대총통이 자치 기관의 철폐를 명령하면서 창립한 지 1년 만인 1914년 3월에 해산되었다.

서간도에서는 신민회의 주도로 1910년을 전후하여 한인 대이주 계획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이 추진되었다. 먼저 1911년 늦봄 이회영·이시영 형제와 이동녕·이상룡 등은 서간도 싼위안푸에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립했다. 서간도 이주가 꾸준히 증가하자 독립운동가들은 1915년 말 혹은 1916년 초에 경학사를 확대한 부민단이란 이주민 통합자치기관을 결성했다. ‘부민단’은 부여의 유민이 다시 일어나 결성한 단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부민단은 중앙부서와 지방 조직을 마련하여 한인 자치를 담당하고, 한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분쟁은 물론 중국인 혹은 관청과의 분쟁 사건을 맡아 처리했다. 부민단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신흥무관학교 운영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봄에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어 1920년 8월 간도참변으로 폐교될 때까지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을 길러냈다. 부민단은 1919년 4월 한족회로 개편될 때까지 한국인이 거주하던 서간도 전 지역을 망라한 자치기관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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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와 공립협회 동지들(가운데가 안창호,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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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회원들(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본부, 1913)



미국, 해외 한인을 아우르는 결사를 꿈꾸다

한인이 가장 먼저 정착한 미국 땅은 하와이였다. 1903년 1월 13일 102명의 한인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에서는 1903년 8월에 신민회를 조직한 이래 많은 자발적 결사체가 설립되었다. 1907년에는 24개의 자발적 결사체와 동회 대표 30여 명이 호놀룰루에서 회의를 갖고 통합단체인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자발적 결사체가 생겨났다. 1903년 9월 23일 안창호 주도로 친목회가 만들어졌다. 이 친목회를 발판으로 1905년 4월 공립협회가 창립했다. 공립협회는 1907년까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로스앤젤레스 등 6개 지역에 지방회를 설립했다. 1909년 2월에는 한인합성협회와 공립협회가 합동해 국민회를 발족시켰다.

국민회는 한인 사회를 대표하고 한인을 보호하는 자치정부임을 자처했다. 조직은 총회와 지방회로 구성하고 본토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를 두었다. 이듬해인 1910년 2월에 대동보국회와 통합한 국민회는 5월에 이름을 대한인국민회로 바꿨다. 미국 한인의 최고 기관으로 수립된 대한인국민회 역시 자치 정부 역할을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먼저 대한인국민회는 “국가인민을 대표하는 총기관”으로서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설립을 서둘렀다. 1911년 8월 발족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국민회를 통할한 기관이요 한 나라 정체로 말하면 일체 법령을 발하는 중앙정부’를 자처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만주, 연해주 등을 포함하여 116개의 지방회를 두었다. 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결성 선포식을 가지며 다음과 같은 선포문을 발표했다.


"우리는 나라가 없으니 아직 국가 자치는 의논할 여지가 없거니와 우리의 단체를 무형한 정부로 인정하고 자치제도를 실시하여 일반 동포가 단체 안에서 자치제도의 실습을 받으면 장래 국가 건설에 공헌이 될 것이다."


1913년 7월 12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헌장을 개정하여 제1조에 “본회는 대한국민으로 성립하여 대한인국민회라고 칭함”이라 규정했다. 대한인국민회가 대한국민을 기반으로 한 자치정부임을 선포한 것이다. 1914년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소재지인 캘리포니아주 정부의 허락을 얻어 명실상부한 한인자치기관으로서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역시 하와이주 정부의 인가를 얻어 자치기관으로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는 미주 한인의 자치정부를 자임하는 동시에 ‘정신상의 민주주의 국가’ 즉, 무형국가론을 제기하면서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펼쳤다. 비록 해외 한인을 아우르는 자치정부로서의 임시정부라는 위상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미주 한인에게 대한인국민회는 독립과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향해 나가는 무형정부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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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3·1절 1주년 기념식(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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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회에서 발행한 기관지 『권업신문』



연해주, 최초의 임시정부를 만든 자치의 힘

한국인이 러시아 연해주 지방으로 건너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1900년 무렵에는 10만 명이 넘는 한인이 연해주에 살았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할 무렵에는 18만 명이라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연해주에 터전을 잡고 있었다.

연해주 한인사회는 마을별로 자치 기구를 만들어 자치를 실시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교외에 있던 신한촌에서는 신한촌민회가 자치를 실시했다. 신한촌 사람들은 본래 블라디보스토크 중심지에 있던 개척리에 살았다. 이때는 한민회를 결성하여 자치를 실시했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 서북쪽에 자리한 신개척리로 옮긴 후에 그곳을 신한촌이라 명명하고 한민회를 신한촌민회로 개편했다. 신한촌민회는 독립운동가 20인을 평의원으로 선출해 그들이 사업과 예산 등을 심의하고 임원을 선출하도록 했다.

1911년 12월 신한촌에서 권업회가 결성되었다. 권업회는 연해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갖고 출범한 결사체였다. ‘권업’이란 말은 무장조직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을 숨긴 채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받기 위해 내세운 이름이었다. 권업회를 대표하는 실질적 운영자인 의사부 의장에는 이상설, 부의장에는 이종호가 선출되었다. 중앙조직을 정비한 권업회는 연해주 전역에 걸쳐 지회와 분사무소를 설치했다.

권업회는 한인 자율의 공동체인 신한촌민회와 달리 합법적인 자치 기관으로서 한인 관련 행정 사무를 취급했다. 토지의 조차와 귀화 등의 처리도 그들의 몫이었다. 때로는 수백 호의 한인을 집단 이주시켜 도처에 한인 개척지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권업회는 교육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신한촌에 있던 계동학교를 한민학교로 개편해 연해주 한인의 중추 교육 기관으로 만들었다.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업은 러시아 당국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수행했다. 권업회는 러시아가 아닌 만주의 나자구에 대전학교를 설립했다. 이어 밀산부를 비롯한 여러 곳에 조차지를 마련하고 군영지로 활용했다. 1912년 4월 22일에는 기관지인 『권업신문』을 창간해 연해주는 물론 서·북간도와 미국 등지의 한인 사회에 보급했다. 권업회는 1914년 봄 대한광복군정부 결성을 서둘렀다. 이상설을 대통령,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추대한 임시정부를 세워 독립군의 항일투쟁을 통일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1914년 9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의 요구로 권업회는 강제해산당했고 지도자들은 추방당했다. 이후 한인자치공동체의 강한 전통 속에서 1917년에 결성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1919년 2월 25일에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함으로써 임시정부 수립의 꿈을 이뤘다.


만주, 미국, 연해주로 건너간 한인들은 여건이 허락되는 한, 자발적 결사체를 결성하고 한인 자치를 실시하고자 했다. 이렇게 어렵게 만든 한인 자치 단체의 운명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그들이 터를 잡고 있는 중국, 미국, 러시아의 내정과 외교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해방이 될 때까지 한인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 한인만의 자치를 도모하며 독립운동의 터전을 일구려는 노력이 간단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