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세기말의 억눌린 꿈과
만민공동회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
세기말의 억눌린 꿈과
만민공동회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옆에 있는 독립문이 정확히 어떤 ‘독립’을 상징하는지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대개는 일제강점기 유산인 서대문형무소 옆에 있으니 당연히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고 생각한다. 독립문은 1896년 독립협회가 중국에 대한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짓기 시작한 기념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문이 꼭 중국에 대한 독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이권 다툼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일국의 국왕인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정무를 볼 정도였다. 독립문에는 이처럼 위기에 처한 조선을 열강의 야욕으로부터 지키고 자유로운 나라로 일으켜 세우겠다는 비원(悲願)이 깃들어 있었다.

만민공동회 민중대회 기록화

청나라 변법자강운동을 이끈 캉유웨이
자주적 근대화의 길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청에 부응해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자주독립국을 위한 구상을 마무리한 뒤, 그해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1월 20일 독립문도 완공되었다. 그러나 선언만으로 독립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부산 앞바다의 절영도를 조차하겠다며 고종을 압박해 왔고 일본, 미국 등의 경제 침탈도 심해졌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독립협회는 민중과 함께 진정한 독립을 위해 궐기하기로 결심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는 그렇게 막이 올랐다.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10일 오후 2시 종로에서 열렸다.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1만 명이 넘는 민중이 참여했다. 이 집회에서 정치인으로 데뷔한 이승만을 비롯해 수많은 인사가 연단에 올라 러시아를 비난했다. 민중의 엄청난 열기에 놀란 러시아는 절영도를 조차하려는 계획을 일단 철회했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대한제국, 독립협회, 열강 모두에게 민중의 힘을 절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시기 이웃 청나라에서는 변법자강운동이라는 자주적 근대화 개혁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27살의 젊은 황제 광서제가 발탁한 캉유웨이, 딴스퉁, 량치차오 등 젊은 관료들이 일으킨 바람이었다. 캉유웨이는 청나라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며 개혁만이 살길이라고 광서제를 설득했다. 그는 유럽의 폴란드가 주변 열강에게 야금야금 분할 당하다가 마침내 지도에서 사라진 것을 상기시켰다. 청나라의 운명도 그와 같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린 것이다. 캉유웨이가 개혁의 모범으로 삼은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서구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강대국으로 탈바꿈하고 있으니, 청나라도 그 예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서양의 헌법 체계를 받아들이면서도 천황 체제를 유지했듯이, 청나라도 전통 유교와 황제 체제 아래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변법자강의 뜻을 알리는 광서제의 담화문이 발표되고 광업과 상업 등 산업을 일으킬 관청이 속속 설치되었다.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일 인재를 키우기 위해 국립대학인 경사대학당도 들어섰다. 청나라가 자주적 근대화를 시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842년 아편전쟁의 쓴맛을 본 뒤로 1860년대부터 쯩궈판, 리홍장 등을 중심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양무운동을 벌인 바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낡은 제도를 그대로 둔 채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펼친 개혁은 1884년 프랑스, 1895년 일본과 벌인 전쟁에서 연이어 패함에 따라 빛을 잃고 말았다. 이에 제도 자체를 뜯어고쳐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것이 변법자강운동이었다.
안타깝게도 만민공동회와 변법자강운동은 비슷한 길을 갔다. 민중의 참여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듯하던 만민공동회는 정부 내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애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고종은 독립협회가 황제 권력을 부정하는 공화제를 추진한다는 일부 관료들의 모함에 넘어가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개혁을 중단시켰다. 변법자강운동의 적은 어린 광서제를 대신해 나라를 통치해 오던 서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수구 세력이었다. 결국 서태후의 반격에 의해 변법자강운동은 성과 없이 막을 내리고 청나라는 점점 더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해 갔다.

미국의 메인호가 침몰하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

필리핀 5페소 주화에 있던 아기날도(2017년 보니파시오로 바뀌었다)
독립의 길
만민공동회는 대한제국이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보려는 안간힘이었다. 바로 그 시기에 식민지 체험이 얼마나 뼈아프고 지긋지긋한 것인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났다. 1898년 12월 10일, 라틴아메리카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에스파냐의 식민지 쿠바가 마침내 독립한 것이다. 물론 독립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895년 2월부터 에스파냐를 상대로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인 끝에 얻어낸 소중한 결실이었다.
독립을 이룩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독립을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쿠바는 독립하자마자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쿠바가 에스파냐를 상대로 한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결정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1898년 2월 15일 쿠바의 아바나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군함 메인호가 원인 불명의 폭발로 가라앉자, 미국은 에스파냐에 선전포고하고 쿠바와 함께 싸웠다. 그러나 정작 쿠바가 독립하자 이번에는 미국이 쿠바에 세력을 뻗으려 했다. 미국은 질서 회복과 학교·도로·교량 등의 건설을 내세워 쿠바에 군대와 기업을 진출시키고, 이 나라를 자신의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진행했다. 쿠바가 완전한 독립으로 가는 길은 아직 멀고도 험난했다.
이듬해 1월 23일 이번에는 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에스파냐 식민지가 독립을 선포했다. 혁명의회가 헌법을 승인함에 따라 필리핀이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으로 독립한 것이다. 혁명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아기날도는 1892년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며 마닐라에서 결성된 혁명 조직 카티푸난의 지도자였다. 카티푸난은 1896년 노동자와 농민이 대다수인 1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에스파냐에 대해 무력 투쟁을 벌이는 필리핀혁명을 일으켰다. 혁명 과정에서 아기날도는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하고, 이듬해 3월 혁명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아기날도는 필리핀 총독 프리모 데 리베라의 회유책에 말려들어 잠시 홍콩으로 망명하기도 했지만, 1898년 4월 에스파냐와 미국 사이에 전쟁이 터지자 즉시 귀국했다. 그리고 미국과 힘을 합쳐 에스파냐와 싸운 끝에 혁명의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인 미국의 속셈은 쿠바와 필리핀에서 서로 다르지 않았다. 미국은 에스파냐와 종전 협상을 하면서 괌, 푸에르토리코와 더불어 필리핀을 에스파냐로부터 양도받았다. 결국 미국이 아기날도와 힘을 합쳐 에스파냐와 싸운 것은 필리핀에서 에스파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지 필리핀을 해방시킬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으로 우뚝 선 필리핀은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를 종식했지만, 하루아침에 동맹국에서 침략자로 돌변한 미국과 새로운 전쟁을 치를 위기를 맞았다. 쿠바가 그랬던 것처럼 필리핀이 완전 독립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쿠바와 필리핀의 사례가 대한제국에 주는 교훈은 분명했다. 가능하면 처음부터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는 길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든, 힘에서 밀리든, 일단 한 번 지배를 받게 되면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치러야 하는 대가는 상상 이상이었다. 더욱이 수천 년간 독립을 유지해 온 한국인에게 남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고통은 쿠바나 필리핀보다 훨씬 더 클 것이 틀림없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만민공동회와 변법자강운동이 좌절하고 쿠바와 필리핀의 독립에 브레이크가 걸린 상태에서 19세기는 저물었다. 바로 그때 독일의 한 의사가 지금까지 없던 충격적인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의사가 발표한 책의 제목은 『꿈의 해석』. 그동안 꿈에 대한 해석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미래에 대한 예지 따위가 담긴 신비로운 현상으로 보는 데 그치곤 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꿈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심리 세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꿈을 무의식의 활동으로 보는 파격적 결론에 도달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은 억압되고 억제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의식적으로는 차마 드러내 놓고 추구하지 못하는 은밀한 욕망을 꿈속에서 표출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프로이트의 진단은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무의식의 세계에 메스를 들이대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한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밝고 떳떳한 모습으로 포장된 의식은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러한 의식 이면에 어둡고 은밀하지만 솔직한 모습의 거대한 무의식이 똬리를 틀고 있는 셈이다.
20세기 벽두에 나타난『꿈의 해석』은 세기 전환기의 인류 사회에 대한 은유도 제공한다. 당시 세계를 이끌고 있던 열강들은 밝고 진보적인 세계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억눌리고 왜곡된 식민지와 종속국 민중의 욕망이 거대한 규모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억눌린 욕망이 떳떳한 시민권을 얻을 때까지 피로 얼룩진 인류 사회의 백일몽은 계속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