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 미주 편
공립협회의 신민회 결성과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공립협회의 신민회 결성과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
하와이와 북미의 한인들이 추진한 포츠머스강화회의 국제외교는 비록 성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았으나 민간 주도의 국제외교를 처음으로 시도한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국권회복을 간절히 바라는 국내외 한인들에게 적지 않은 반응을 일으켰다. 이 가운데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공립협회는 매우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공립협회 창립 위원(앞줄 왼쪽부터 송석준·이강·안창호, 뒷줄 왼쪽부터 임준기·정재관)
대한신민회의 발기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에 망국의 암운이 점차 짙어지자 공립협회는 피동적인 ‘백성’이 아닌 주체적인 ‘국민’된 신분만이 위기에 빠진 국권을 회복시킬 수 있다며 공화주의 사상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즉, 국권회복의 주체가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한 ‘백성’이 아니라 주권을 가진 ‘국민’이 될 때 국권회복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때의 국권회복은 국민이 주체가 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꿈이었다. 이러한 꿈은 1906년부터 제기되다 1907년 1월 초 대한신민회의 발기로 그 윤곽을 드러냈다.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는 1907년 1월 초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안창호·이강·임준기·신달윤·박영순·이재수 등 공립협회 요인들이 발기한 조직이다. 참여자들은 구체적인 설립 방향과 내용을 담은 「대한신민회취지서」, 「대한신민회의 구성」, 「대한신민회통용장정」을 작성했다. 대한신민회를 발기한 것은 국내에 공립협회 지부를 설립하기 위한 방안에서 나왔으나 단순히 지부 설립만 의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민(新民)’에 의한 부강한 문명국가를 꿈꾸며 추진되었다.
대한신민회의 설립 취지를 보면 ‘새로운 사상(신사상)’으로 ‘새로운 단체(신단체)’를 만들어 장차 ‘새로운 국가(신국)’를 건설하기 위함이라 했다. 이에 따라 국민과 산업을 새롭게 탈바꿈(유신)해 자유문명국을 수립하는 데 설립 목적을 두었다. 새로운 국가인 자유문명국이란 바로 공화주의 정치체제를 갖춘 자주독립국의 건설을 의미한다. 이런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공립협회는 일본의 태극학회, 해삼위의 흥학회, 국내의 대한자강회·서우학회·기독청년회 등과 일치단결해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기로 계획하였다.
비밀결사 신민회의 결성
공립협회의 원대한 포부는 1907년 1월 공립협회 회장 안창호를 전권위원으로 삼아 국내로 파견하면서 본격 추진되었다. 안창호는 1907년 2월 20일 국내에 들어와 대한신민회의 기본 방침에 따라 양기탁·이동휘·이종호·이갑·전덕기·이동녕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는 데 주력했다. 국내에서 설립하기로 한 신민회는 조선통감부의 엄격한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비밀결사 형태로 추진되었고, 1908년 1월에 가서야 그 조직을 완성할 수 있었다. 신민회의 설립이 힘들었던 것은 공립협회와 신민회 간의 위상 정립 문제, 새로운 국가 건설 방향인 공화제 수립 문제, 비밀결사의 여부 문제 등을 둘러싸고 국내 인사들과 오해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민회 창립을 추진할 때인 1907년의 국내 상황은 격심해진 일본의 침략과 통제로 대한제국 정부와 한국민들이 제대로 숨쉬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그해 7월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면서 나온 정미7조약(07.24.), 언론 탄압을 위해 만든 신문지법(07.25.),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금지한 보안법(07.27.),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을 막기 위한 군대 해산령(07.31.) 등 강력한 조치들이 잇달아 발표된 것이다.
국내 상황이 날로 악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립협회는 더 많은 인재와 요인들을 국내로 파견하였다. 1907년 국내로 파견된 인물은 안창호 외에 락스프링스지방회장 황국일(06.11.), 이강(08.27.), 이재명(10.09.), 오대영(10.16.), 임치정(10.25.)이었다. 신민회가 창립될 때인 1908년 1월에는 이교담·김성무가 파견되었고, 이후 서기풍·김병록·노형찬·백원보 그리고 장인환과 함께 스티븐스를 처단해 재판받은 전명운도 파견되었다. 공립협회가 합성협회와 통합하고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개편된 직후인 1909년 4월에는 북미지방총회장 정재관과 헤이그 특사 이상설이 원동지방 전권위원으로 파견되었다.
연해주 진출과 독립군기지 개척
1907년부터 1909년에 걸쳐 공립협회의 주요 요인들이 국내와 연해주로 파견된 것은 국내 신민회 결성과 활동을 돕기 위한 것과 아울러 연해주 각지에 공립협회의 활동지대를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연해주에 집중한 이유는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령 이후 제기된 새로운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신민회의 방략과도 맞물려 있었다. 그러한 신민회의 목적은 1911년 일제의 조작으로 일어난 소위 105인 사건의 심문 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밖에도 이재명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처단 의거에 힘입어 국적(國賊) 이완용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이는 국내 민중들에게 당시 미주 한인들의 강렬한 항일투쟁 의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연해주로 파견된 공립협회 요인 중 이강과 김성무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공립협회의 활동 영역을 확장시켰다. 이강은 1908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봉준과 『해조신문』 발간에 참여한 후 그해 9월 29일 수청(빠르티잔스크)에 공립협회 수청지방회를 설립하였다. 이를 토대로 1911년 1월 12개의 지방회를 가진 대한인국민회 수청지방총회가 만들어졌다. 1909년 1월 7일 김성무는 이강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공립협회 지방회를 만들었는데 이후 이것은 1911년 10월 9개의 지방회를 거느린 시베리아지방총회로 발전하였다.
공립협회는 1908년 10월 21일 본사를 블라디보스토크에 두고 미국과 하와이에 지부를 가진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국민회 설립 이후 1909년 3월 태동실업주식회사로 변경되었는데, 회사 설립은 공립협회가 추진한 독립군기지 개척에 투자하기 위함이었다. 독립군기지 개척계획은 1910년 7월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이강·이종호 등이 독일 조계지 청도에서 결의한 이후 길림성 밀산부의 봉밀산을 중심으로 본격화 되었다.
봉밀산의 독립군기지 개척사업은 거듭된 흉년과 자금 부족으로 그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독립군 기지 개척사업은 공립협회가 신민회 결성과 연해주에서 추진한 공립협회 지부 확장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새로운 자유문명국을 건설하는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연장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