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사람
백미대왕 김종림의 비행

글 임영대 역사작가
백미대왕 김종림의 비행
김종림은 1906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철도 건설 노동자로 일하다가 캘리포니아에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벼농사로 막대한 돈을 번 김종림은 임시정부가 미국에서 한 해 동안 거둔 독립의연금의 10%를 혼자서 낼 정도로 독립운동 지원에 열의를 보였고, 순전히 혼자 힘으로 항공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위한 비행사를 양성하였다. 1973년에 사망하였고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09년에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봉환되었다.
비행기로 민심을 격발하고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라
이민을 꿈꾸는 사람은 지금도 많다. 하지만 오늘날 행해지는 이민 대부분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다. 학업, 취업, 여행 등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외국에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는다.
20세기 초에는 그러지 못했다. 당시 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러시아와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를 노렸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제국주의 시대를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힘이 없었다. 유학을 목적으로 출국한 이들은 나라를 위해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익히려 했다. 빈궁한 생활에서 벗어나겠다며 이주한 이들도 조국 독립에 피땀 흘려 번 돈을 헌납했다. 백미대왕(Rice King) 김종림은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섰던 사람 중 하나다.
김종림이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시기는 1차 세계대전으로 곡물 가격이 크게 오른 때였다. 큰돈을 번 김종림은 농지를 넓혀 사업을 확장하는 동시에, 자신이 번 돈을 조국과 동포를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그가 가장 심혈을 쏟은 사업은 조종사 양성이었다.
"앞으로의 전쟁은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승리가 있습니다. 독립전쟁을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공군이 있어야 하며, 궁극적인 목표는 일본 도쿄 폭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젊은 조종사들을 많이 양성해야 합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이었던 노백린은 하와이 등 재미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순회하며 이렇게 강연했다. 이미 1913년에 미국 지부가 창립될 시점부터 흥사단과 관계하고 있던 김종림은 1920년 초에 노백린을 만나면서 자신이 번 돈을 제대로 쓸 곳을 찾았다.
해방된 조국의 하늘을 위하여
김종림은 자신의 농장이 있던 캘리포니아 북부 윌로우스(Willows) 지역의 40에이커(약 162,000㎡) 토지를 비행학교 설립부지로 기부했다. 그리고 설립 자금으로 2만 달러를 내놓았다. 훈련에 쓸 비행기를 구입하고 미국인 비행 교관을 고용했으며 매년 들어가는 운영비 3만 달러 역시 자신이 부담하기로 했다. 학생들의 숙식비와 수업료도 그가 맡았다.
학교가 문을 연 것은 1920년 2월 20일이었다. 그 전해에 샌프란시스코 인접 도시인 레드우드(Redwood)에서 문을 열었던 레드우드 비행학교의 미국인 교관과 한인 졸업생들, 그리고 미국 내 다른 비행학교에서 비행기를 배운 이들이 교관으로 초빙되었다.
김종림은 이 학교의 총재를, 노백린은 총무를 맡았다. 이 외에도 여러 한인이 학교 운영에 참여했으며, 흥사단 이사장 안창호도 비행기에 의지와 집념이 있어서 학교를 자주 찾았다. 개교하던 시점에 입교한 학생 숫자는 15명이었지만 3월에는 24명, 6월에는 30명으로 늘어났다.
"비행사 중에 다친 사람이 있을 때는 두려움도 없지 않으나,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비행기에 올라 태평양에 높이 떠서 쥐 같은 왜왕의 머리를 부술 예상을 느낄 때는 대한공화국 만만세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한인들에게는 실로 자랑스럽고 희망찬 일이었지만, 비행학교 주변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은 추락사고를 염려했는지 비행학교 운영에 부정적이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장차 조국 광복에 보탬이 되리라는 확신을 품고 최선을 다해 조종을 익혔다. 1920년 7월 7일에 첫 졸업식이 있었고, 우병옥, 오림하, 이용선, 이초 등 4명이 졸업 후 교관으로 특채되었다.
그러나 비행학교는 출발 직후부터 난관을 겪어야 했다. 학교 후원자인 김종림은 쌀농사를 통해 수입을 얻었다. 그런데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쟁 중 올랐던 쌀값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20년 가을에 몰아닥친 폭풍우가 하필이면 추수 전의 윌로우스를 강타했다. 한 해 수확을 모조리 잃은 김종림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당연히 비행학교 운영에도 심각한 지장이 생겼다. 김종림의 사업이 회복되지 못하면서 큰 후원자를 잃은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끝내 문을 닫았다.
학교가 문을 닫은 뒤에도 하늘을 날아 조국을 되찾겠다는 꿈은 모두의 마음속에서 이어졌다. 뿔뿔이 흩어진 교육생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도 공식적인 창설 연원을 윌로우스 비행학교로 두고 있다.
김종림 역시 이후에도 한인공동회,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북미지방동지회 등에 계속 관여하면서 조국 광복과 민족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태평양전쟁 때는 두 아들을 전선에 보내고 자신도 주방위군에 입대하였다. 1971년에는 외무부 장관 명의의 표창장을 받았으며, 평화로운 만년과 함께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