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로 읽는 역사
미국 사회에
한국이 독립국임을 알린
미주 한인들

글 김경미 자료부
미국 사회에
한국이 독립국임을 알린
미주 한인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는 소식을 들은 미주의 한인들은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통치와 식민지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의 독립과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열망을 전 미국 사회에 전파하고자 했다.

<사진01> 하와이 대한독립선언서(국가지정기록물 제12호)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를 수립하다
3·1독립선언의 함성이 조선 전국을 울리고 나라 밖으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중국 상하이에서는 나라를 떠나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립을 선언하였으니 정부를 조직하는 일은 당연한 순서였다. 1919년 4월 10일 오후 10시, 상하이의 프랑스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 오늘날 瑞金路)의 한 양옥집에서 29명의 의원들이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회의의 이름을 ‘임시의정원’으로 정했다. 이는 정부의 입법기관으로서 정부를 조직하고 헌법을 제정할 임무를 지녔다. 의정원을 이끌어갈 사람들은 무기명 단기식 투표(이름을 밝히지 않고 한 사람의 이름만 써내는 것)로, 의장은 이동녕, 부의장은 손정도, 서기는 이광수와 백남칠을 선출했다. 이어 임시정부에 대한 토의를 진행하는 중에 자정이 지났다.
날이 바뀌고, 나라 이름은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정부조직은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국무원에 내무·외무·법무·재무·군무·교통의 6부를 두기로 하고 내각 구성원 선발에 들어갔다. 국무총리는 이승만에 대한 찬반 논란을 벌이다 그 자리에서 추천된 다른 후보자들과 함께 무기명 단기식 투표를 진행하여 이승만이 당선됐다.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문창범은 각각에 대한 동의와 재청으로 결정되었고,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은 각각 추천된 후보자 세 사람 중 투표로 결정됐다.
다음에는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했다. 심사안을 검토할 심사위원으로 신익희, 이광수, 조소앙 세 사람을 뽑아 심사보고를 하도록 하고, 다시 회의를 통해 몇 개 조항을 개정한 후 임시헌장을 의결했다. 임시헌장에는 서두에 헌법 전문 형식의 선포문을 두어, 임시정부가 3·1운동과 국민의 신의로 수립되었으며 완전한 자주독립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임시헌장을 선포한다는 뜻을 밝혔다. 10개 조로 구성된 임시헌장은 국체와 정체, 기본권 등에 관한 규정을 담았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제1조이다.
마지막으로 선서문과 정강을 채택했다. 선서문에서는 3·1운동을 찬양하고 임시정부가 국토 광복의 사명을 이행할 것임을 다짐했고, 정강으로는 민족·국가·인류의 평등을 널리 알리고 절대독립을 맹세코 도모할 것 등 6개 항을 정했다. 이상으로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를 마치고 나니, 시간은 4월 11일 오전 10시였다. 3·1운동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후 40여 일 만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독립국인 ‘대한민국’을 자주적인 국민이 다스리는 ‘민주공화국’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하와이 대한독립선언서
<사진01>의 「대한독립선언서」는 바로 3·1독립선언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을 한 장의 포스터에 담고 있다. 가운데에는 3·1운동의 민족대표가 준비하여 보성사에서 인쇄한 ‘3·1독립선언서’, 아래에는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선포문’의 원본이 재인쇄되어 있다. 한자로 쓴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는 영어(The Proclamation of KoreanIndependence)로도 쓰여 있으며, 단군기원으로 표시한 ‘기원 4252년 3월 1일(紀元 四二五二年 三月一日)’의 날짜도 서기 연도와 영어(1919 AFTER NOON MARCH FIRST)가 함께 쓰여 있다.
무궁화꽃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이 대한독립선언서는 미국 하와이의 여성단체인 ‘대한부인구제회(theKorean Ladies' Relief Society)’에서 만든 것이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하와이 각 지방의 여성대표 41명은 1919년 4월 1일 호놀룰루에 모여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첫 사업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기금을 모으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재인쇄하여 판매하기로 하고, 350달러를 들여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 출판사(Honolulu Advertiser Publishing Company)에서 약 61×79㎝ 크기의 포스터 3,000장을 컬러 인쇄했다. 3·1독립선언서와 민족대표 33인의 명단, 임시정부의 각료 명단과 임시헌장을 한 장에 담은 대한독립선언서는 한국인뿐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팔렸으며, 판매 수익금 2,200달러 중에서 800달러는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이 워싱턴에 설립한 구미위원부로 보냈다. 이후에도 대한부인구제회는 떡과 엿을 만들어 파는 등의 모금 활동을 벌여 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를 지원했다.

<사진02> 제1 차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 표지와 속표지.
제1차 한인회의의 회의록으로, 영문으로 만들어 미국사회에 널리 홍보했다.
1,000부 중 500부는 무상으로 한인과 미국의 각 기관과 단체에 보내고, 나머지는 1달러씩 받고 팔았다. 다음의 사진(03~07)들은 이 회의록에 수록된 것이다

<사진03> 리틀극장 앞의 참가자들

<사진04> 리틀극장에서 독립기념관까지의 시가행진

<사진05> 독립기념관 앞에 도착한 참가자들

<사진06> 1776년 미국 독립선언이 이루어진 방에서의 서재필

<사진07> 조지 워싱턴이 헌법 서명을 주재하며 앉았던 의자에 앉아있는 이승만

<사진08> 시가행진 때 사용했던 태극기. 대나무 깃대에 구리로 만든 화살촉 모양의 깃봉이 달려 있으며, 서재필기념재단에서 한국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다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한편 미주 본토의 한인들은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는 소식이 들리던 무렵, 미국 사회를 향해 대규모의 선전외교활동에 나섰다. 서재필과 이승만은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 일명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했다. 필라델피아는 미국이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을 했던 독립기념관(Independence Hall)이 있는 곳으로서, 한국의 3·1독립선언은 미국 독립선언의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인쇄와 문방구점(Philip Jaisohn & Company)을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던 서재필은 이번 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활동을 주도했다. 한말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사로 생활했으며, 잠시 한국에 돌아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만들어 개화운동을 전개하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던 그는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것이다.
필라델피아 시내 리틀극장(The Little Theatre)에서 진행된 제1차 한인회의에는 약 150명의 한인이 참가했다. 당시 북미 한인의 숫자가 약 1,500명에 불과했음을 감안할 때 상당수의 사람이 참석한 것으로, 그들 중 많은 수가 미국 중·동부 지역의 유학생들이었다. 회의는 3일간 매일 오전 오후로 나뉘어 진행됐다. 오전 9시30분부터 필라델피아 성삼위일체(Holy Trinity) 교회의 톰킨스(Floyd W. Tomkins) 목사, 오하이오주 오벌린(Oberlin) 대학 밀러(Herbert A. Miller) 교수, 필라델피아『이브닝 레저(Evening Ledger)』지의 베네딕트(George Benedict) 기자 등 미국 사회 유력 인사들의 초청 강연이 있었다. 오후 1시 30분부터 주제별로 각위원회가 준비한 결의문과 호소문에 대한 발표 및 토의가 이어졌다. 결의문과 호소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 「워싱턴의 미국 적십자본부에 보내는 호소문」,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일본의 지각있는 국민에게 보내는 결의문」,「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 등이다.
16일 마지막 회의를 마친 후 4시 정각에 참석자들은 태극기와 미국 국기를 양손에 들고 독립기념관을 향해 시가행진을 시작했으며, 필라델피아시에서 제공한 1개 예비군 소대와 악대가 선두에서 행렬을 이끌었다. 독립기념관에 도착한 일행은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이 서명되었던 방으로 들어갔고 당시의 의자와 탁자, 잉크병이 그대로 놓여있는 그곳에서 임시정부의 대표자로 선임된 이승만이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 함께 만세삼창을 한 후 방을 나와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을 알렸던 ‘자유의 종’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으며 그 옆을 지났다. 독립기념관 앞에서의 기념촬영을 끝으로, 1919년 4월 16일 오후 5시 제1차 한인회의는 3일간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
한인회의는 필라델피아시 당국의 협조와 함께 신문사에서도 적극적으로 여론을 일으켜 주었다. 16일자『필라델피아 레코드(Philadelphia Record)』지에서는「한국의 독립」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은 독립을 얻을 자격이 있으며, 우리는 그들이 독립을 얻기를 바란다”는 사설을 실었고, 17일 자에는 대회 마지막 날 시가행진과 독립선언 행사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제1차 한인회의의 성과는 한국의 독립문제를 알리고 지원할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들이 떠난 조국으로부터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닿는 곳에 살고 있던 미주 한인들은 3·1독립선언에 이어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에 고무되어,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자신들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일, 미국 사회에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행동목표로 정하고, 스스로 부과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