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일제 식민지 잔재와
청산의 현주소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
일제 식민지 잔재와
청산의 현주소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우리 삶에 침투한 식민 잔재
요즈음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노력과 함께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제의 35년간 식민통치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주었는데, 아직도 그 잔재가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는 반성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친일 잔재는 유형, 무형으로 도처에 남아있다. 일제가 동화정책을 실시하며 한민족을 말살시키려 했기에 더욱 그렇다. 일제는 한국사를 왜곡시키고 일본사를 강요하였으며 한글을 가르치지 않고 한국어를 금지하는 대신 일본어로 채웠다. 한국의 역사는 일본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지배가 당연하며 오히려 한국에 행운이라는 약육강식의 이론을 내면화시켰다.
1945년 8월, 일제 패망 이후 우리에게 해방이 찾아왔다. 할 일이 산적했다. 크게는 독립된 자주 국가도 세워야 했고 친일파를 단죄해야 했으며 작게는 일제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해야만 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인적 요소는 물론 제도와 운영 방식, 정치·문화 등 식민지의 잔재는 한국 현대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무의식중에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침투하여 삶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겉으로 드러난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양옥·양장·양복·양파 등 새로운 서양의 것에 ‘양(洋)’자를 붙여 우리의 것과 구분하려 하였지만, 서양 문물은 의외로 폭넓고 강력했다. 우리 의식주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것만 봐도 그렇다.
특히 언어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 쉬운 예로, 벤또(弁?べんとう, 도시락), 사라(皿さら, 접시), 요지(楊枝ようじ, 이쑤시개), 쓰메끼리(爪切りつめきり, 손톱깎이), 바께쓰(バケツ, 양동이) 등과 같은 단어들은 꽤 흔하게 쓰인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에 맞서 한글학자들은 사전을 편찬하거나 ‘맞춤법통일안’ 등을 연구, 발표하였다. 그렇지만 일제가 서구의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번역한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 또한 적지 않았다. 그것을 대체할 우리의 언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이나 언론 등 일부 분야에서는 일본어가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노가다(공사판 노동자), 하시라(기둥), 하리(보), 렝가(벽돌), 고대(흙칼) 등과 사쓰마와리(경찰서 순회), 야마(요지), 미다시(제목), 우라까이(베끼기), 반까이(만회 보도) 등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국민학교 애국조회 장면(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일제강점기 애국조회(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교육 현장의 식민 잔재와 교육계의 노력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아갈 학생들의 교육 현장에 식민지 잔재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일제의 군국주의식 교육 문화가 한동안 한국의 교육계를 장악한 적도 있다. 학교의 병영화(교련)와 상명하달의 불평등한 교육 구조 등. 이것들은 특히 박정희 군사독재 시기에 더욱 고착화 되었다. 학교는 국가의 통제를 잘 따르는 기관이어야 하며 규율과 규칙에 순종하고 상벌로 대열 이탈을 막아 ‘조국과 민족’에 충성을 다하는 학생을 길러내야 했다. 오죽했으면 당시에 만들어진 국민교육헌장의 첫머리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말로 시작했을까?
이러한 군국주의식 교육 문화는 그동안 자정노력을 통해 극복되어 왔다. ‘천황에게 충성하는 황국신민’이라는 뜻의 ‘국민학교’가 51년 만에 ‘초등학교’로 바뀌었고, 애국조례, 학교장 훈화, ‘차렷·경례’ 등의 문화도 사라지고 있다. 많이 늦기는 했어도 교육계가 적극 나서서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잔재들이 많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친일 경력자가 작사·작곡한 교가가 불린다. 심지어 일본 군가풍의 교가를 사용하는 곳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강조되기 시작한 ‘근면·성실·협동’의 훈육적인 구호도 교훈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복 역시 일제강점기 획일적으로 학생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문화는 지금도 변함없다. 일률성과 규제에 그 어느 시기보다 민감한 청소년들에게 교복은 더할 나위 없는 구속과 통제의 상징일 뿐이다. 일본인과 한국인 학교를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제일고·○○동중학교·○○서중학교의 명칭도 바꿔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 일제가 사용한 ‘유치원’이라는 용어 대신에 ‘유아원’으로 바꾸었는데 우리는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민족을 넘어 세계로, 우리 문화의 힘
고려시대에 원나라로부터 100년 가까이 내정 간섭을 받은 때가 있었다. 당시 몽골족의 변발과 호복(胡服)이 고려 지배층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공민왕이 자주적인 국권을 회복하고자 반원 정책을 추진하여 몽골풍을 폐지하기도 하였지만, 그 흔적은 현재 우리 주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상대를 낮춰 부를 때 쓰는 ‘○○치’라는 단어가 그러한 예인데, 벼슬아치·양아치·장사치 등이다. 본디 몽골에서는 ‘○○치’가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라 한다. 문화접변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문화는 식민 문화였고 한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강제한 측면이 강하다. 이것은 힘에 의한 문화전파이며, 어쩔 수 없는 수용이었다. 이러한 강제성 때문에 그 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세계는 타 문화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우리의 문화를 전파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 교류는 자주적이며 능동적이다. 특히 지금 우리 문화는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8년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은 빌보드 200에서 1위를 한 바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2천만이 넘는 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민족이다. 일제로부터 피동적이고 강제적으로 수용했던 문화를 우리의 것으로 다시 창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