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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시대의 개막과 갑신정변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
제국주의 시대의 개막과 갑신정변
1884년 베를린 궁전에 13개국의 유럽 열강들이 모여 식민지를 나누고 있을 때, 조선에서는 김옥균을 비롯한 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혁명이 모의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꿈꿨으나 롤러코스터를 탄 듯 거세게 흔들리는 국제정세 속에서 정변은 3일 만에 막을 내려버렸다.

오리엔트 특급 열차 운행 광고 포스터
오리엔트 특급과 베를린 회의
1883년 독일의 다임러가 가솔린을 원료로 사용하는 내연기관을 개발했다. 그동안 동력기관으로 사용되던 증기기관은 외연기관이었는데, 엔진의 외부에서 동력이 공급되기 때문에 열 손실이 크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내연기관은 실린더의 내부에서 연료를 연소시켜 생긴 가스의 팽창력으로 피스톤을 움직이는 원동기이다. 따라서 내연기관은 외연기관보다 열효율이 훨씬 더 좋다. 다임러의 가솔린 엔진이 최초의 내연기관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1860년 에티엔 르누아르가 전기로 점화하는 내연기관을 발명한 바 있었다. 1867년에는 니콜라우스 오토가 상업적 가치를 지닌 내연기관을 개발했다. 그러나 르누아르와 오토의 엔진은 석탄 가스를 원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수송용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다임러의 가솔린 엔진은 그 같은 문제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다임러는 나아가 1885년 벤츠와 함께 이 엔진을 장착한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에 뒤질세라 기차의 발전도 가속 페달을 밟았다. 다임러가 가솔린 내연기관을 개발하던 그해, 유럽 최초의 대륙 횡단 특급열차가 프랑스 파리에서 첫 기적을 울렸다. 벨기에의 사업가 조르주 나겔마케르가 개발한 열차는 장거리 여행에 대비해 침대차·식당차·흡연실·숙녀용 객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뮌헨·빈·부다페스트·부쿠레슈티를 지나 불가리아 바르나 항에 이르는 2,740㎞의 여정을 소화한 뒤 기선에 실려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까지 갔다. 훗날 이스탄불까지도 철로를 따라 달리게 될 이 열차가 바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로도 유명한 ‘오리엔트 특급’이다. 급격히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로 묶고 있었던 것이다.
서유럽을 중심으로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1884년 독일제국의 심장부인 베를린 궁전에 13개국 서유럽 열강이 모였다. 아프리카에서 영토 확장에 골몰하던 열강들이 대륙 중심부에 있는 콩고를 두고 충돌이 벌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댄 것이다. 쟁점은 콩고만이 아니었다. 사실상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점적 지위를 놓고 다투었다. 결국 영국에 밀려난 프랑스는 알제리 등 서아프리카로 눈을 돌렸고, 이에 따라 다른 나라도 경쟁적으로 아프리카 땅따먹기에 뛰어들었다. 독일 수상 비스마르크는 우발적이고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면서 땅을 나눠 가지기 위해 베를린 회의를 주선한 것이다. 그래서 베를린 회의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신호탄으로 불린다.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아프리카를 포함한 세계 전역을 식민지와 세력권으로 완전히 나누어 가진 열강과 그들의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1880년대에 그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홍영식·서재필· 김옥균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그런 시기에 조선에서는 자주적 근대화를 지향하며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개화 정책을 추진해 온 젊은 관료들이 정변을 일으켜 보수 세력을 추방했다. 그들은 불과 16년 전 일본에서 일어난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16년의 세월은 메이지 유신과 갑신정변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왔다. 산업화에 성공해 서유럽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일본은 조선의 개화파를 돕는 척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계획을 진척시켰다. 서유럽 열강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로의 변신을 꾀했던 것이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수구 세력인 민씨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다. 일본도 나름의 속셈을 갖고 이들의 요청에 응했다.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회장 근처에서 치솟은 불길을 신호로 민씨 정권의 중진인 민영익이 공격당하고 민영목·민태호·조영하 등이 차례로 살해되었다. 개화파는 새 정부를 수립, 14개 항의 정강을 공포했다. 문벌을 폐지해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우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는 혁신적인 내용이 담겼다. 지조법을 개혁해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재정을 넉넉히 한다는 경제 개혁도 포함되었다. 나아가 대신과 참찬이 매일 합문 내의 의정소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하는 방안은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추구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민씨 세력의 요청으로 청국이 출동, 일본 군대가 재빨리 발을 빼는 바람에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정변의 주역들은 죽거나 일본, 미국 등으로 망명했다.

베를린 회의 이후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 지도
세계, 롤러코스터를 타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일본의 본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에 의존한 것이 가장 크다. 당시 일본이 걷고 있던 제국주의의 길은 베를린 회의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놓고 청과 일본이 옥신각신하던 1885년, 베를린에 모인 13개 열강은 합의문을 도출했다.
합의문에 따르면 유럽 열강은 앞으로 아프리카에서 서로 전쟁을 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한 나라가 특정 지역을 차지하면 다른 나라는 그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 같은 합의를 바탕으로 영국은 이집트와 수단의 영유권을 확보한 데 이어 그 남쪽의 케냐·로디지아·남아프리카로 이어지는 남북 띠를 형성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프랑스는 알제리를 비롯해 적도 이북 아프리카의 서부를 차지하기로 했다. 베를린 회의의 주최국 독일은 케냐 일부와 서남아프리카로 진출했다. 아프리카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유럽 열강이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나눠 먹는 꼴이었다. 아프리카에는 원주민 부족들의 자연적 경계를 무시한 채 유럽 국가들이 마음대로 그은 경계선이 생겨나고 있었다.
가솔린 자동차가 거리를 달리고 특급 열차가 대륙을 가로지를 때 세계는 현기증 나는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현란한 속도와 변화의 변주곡을 잘 표현하는 발명품이 1884년 미국의 코니아일랜드에 등장했다. 사람을 싣고 허공을 뱅뱅 돌며 질주하는 놀이기구였다. 사업가 라 마커스 톰슨이 ‘롤러코스터’라는 이름을 붙여 특허를 낸 이 기구는 꽈배기처럼 꼬인 궤도를 돌면서 솟구치기도 하고 뒤집히기도 하며 탑승객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런데도 탑승객은 기구에서 떨어지지 않으니 신통방통한 노릇이었다. 톰슨에겐 ‘중력의 아버지’라는 애칭이 선사되었다. 롤러코스터는 19세기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대중오락에 적용해 대성공을 거둔 상품이었다. 1880년대 중반에 롤러코스터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미국과 유럽의 유한 계층에 국한되었다. 그들이 이끄는 세계는 롤러코스터처럼 온 세상을 뒤집어 놓으며 질주했다. 제국주의 시대의 개막은 유럽인에게 현기증이 날 만큼 신나는 세상을 보여주었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다수 주민에게는 아찔한 위기의 나날들로 다가왔다.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이자 미술 공예 운동을 이끈 윌리엄 모리스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보지 못한 것
유럽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제국주의 시대의 휘황한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며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주역은 사업가, 정치인, 군인 등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노동자, 농민, 소상인 등 중하층을 이루는 대다수는 자본주의 발전의 과실을 넉넉히 누리지 못했다. 유럽이 이룩한 급속한 산업화는 분명 그들이 열심히 일한 덕분이었지만, 그들이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선도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칼 마르크스다. 그는 1883년 세상을 떠났다. 마르크스의 저서와 사상은 그가 죽은 뒤에 더 유명해졌고, 유럽 곳곳으로 그의 이름을 내건 혁명운동이 번져 갔다. 물론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려는 사상의 전부는 아니었다. 1884년 영국 런던에서 사회주의동맹을 결성한 시인이자 공예가 윌리엄 모리스도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세상을 바꾸려 한 혁명가 중 한 사람이었다.
모리스는 예술가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이유를 자신이 믿는 예술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그에게 예술은 인간 노동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고, 건전한 예술은 제작자와 향유자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었다. 모리스는 진정한 예술은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해 만들어진 예술이라면서 예술을 민중의 노동 자체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미술 공예 운동의 중심에 섰다. 기계로 만든 제품에 반대하며 고딕 양식을 되살리고 중세 길드의 수공업 방식으로 돌아가 노동과 예술이 일치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외쳤다. 모리스는 벽지·타일·스테인드글라스·가구·책 등 누구나 사용하는 생활 주변의 사물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처럼 생활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예술 사상과 실천 때문에 지금도 그는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장인 공동체라 할 수 있는 모리스의 회사에도 문제는 있었다. 그의 회사에서 일하는 100여 명의 노동자 또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모리스는 노동자가 아름다운 집에서 아름다운 책을 읽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꿈꾸었지만,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에게조차 그 꿈을 이루어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1880년대 유럽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아직 봉건 왕조에 머물러있던 조선에서 막 근대의 꿈을 꾸기 시작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유럽의 그런 속사정을 알 수 있었겠는가? 조선에서 가장 선진적인 교양과 지식을 갖춘 엘리트조차 제국주의의 속살은커녕 겉모습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가운데 1880년대의 세계는 롤러코스터처럼 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