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사람
민족과 인간을 사랑한
청년 강상호

글 임영대 역사작가
민족과 인간을 사랑한
청년 강상호
강상호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1887년에 명문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주어진 신분과 유복한 삶을 누리기만 하지 않았다. 20살 나이에 진주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으며, 32살 때는 진주지역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36살이 되는 해에는 형평사를 창립하여 심각한 사회적 차별에 시달리는 백정들을 도왔다.진주노동공제회와 14개나 되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였고, 40세에 신간회 진주지회 감사를 맡았다. 1957년 사망,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장엄한 학생대중이여! 궐기하자! 굳세게 싸우라!
막대한 재산이 있고 지역에서 존경받는 명문가 출신 청년이라고 하면 민중을 위한 삶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기 쉽다. 소위 있는 집 자식들이 타인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 또는 자신과 비슷한 계급 출신자만을 위해 사는 건 오늘날이나 예전이나 흔한 일이다. 하지만 흔한 일이었다고 해서 모두가 그랬던 건 아니다. 자신보다 상황이 나쁜 타인을 돕고 나라를 구제하는 데 물려받은 재산과 사회적인 지위를 이용한 이들도 많았다. 강상호는 진주에서도 유명한 천석꾼에 양반집 아들이었다. 부친은 정3품 통정대부 벼슬까지 지냈다. 비록 나라가 기울어서 아들인 강상호는 옛날처럼 과거도 볼 수 없고 출세하기도 어려워졌지만, 고향에서 존경받으며 살기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강상호는 조용히 삶을 즐기지 않았다. 일본의 손아귀에서 무너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싸웠다. 강상호가 처음 사회 활동을 시작한 건 그가 스무 살 되던 해인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참여였다.
"나라가 일본에 진 빚이 1,300만 원입니다. 나라에는 그만한 돈이 없고, 빚을 갚지 못하면 이 나라는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동포들이 담배를 끊고 술을 끊어 돈을 모은다면 석 달 안에 그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모두 동참합시다."
안타깝게도 국채보상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위협을 느낀 일제가 주동자인 양기탁에게 모금한 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씌웠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에 뻗치고 있는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한국 정부가 추가로 빚을 지게 했다. 참가자들의 의기는 높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동이었다.
쓰러지지 않는 청년의 힘
강상호는 민족을 위한 자신의 첫 싸움이 실패한 뒤에도 주저앉지 않았다. 1919년, 그가 32살이 되던 해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강상호는 적극적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사람들을 모아 만세를 부를 날짜를 정하고, 예정일인 3월 10일 진주 장날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강상호를 붙잡아 ‘보안법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
"사람은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 백정도 사람이고 양반도 사람입니다.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합니다.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하지 않는 것은 위선이며,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세운동 이후 강상호가 관심을 가진 문제는 백정 차별이다. 도축업에 종사하는 백정들은 조선시대부터 제대로 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법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뒤에도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계속 유지됐다. 백정은 일반인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일반 학부모들이 제 아이를 백정과 함께 공부시킬 수 없다고 반발하여 아무리 돈이 있는 백정이라 할지라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일반인과 다툼이라도 벌어질 양이면 경찰은 무조건 백정 잘못으로 몰아갔다. 사랑과 평화를 전한다는 교회 예배조차도 백정은 일반 신자들과 따로 보아야만 했다. 서양 선교사도 그 악습을 이길 수 없었다. 심지어 살인사건까지 일어났다. 진주 청년 몇사람이 백정에게 개를 잡으라고 시켰으나 백정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청년들은 건방지다는 이유로 백정을 때려죽였다. 사건에 대해 일본 경찰은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강상호는 이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강상호가 백정을 위해 나섰다. 백정의 아이를 자신의 양자로 들여 호적을 바꾼 다음 학교에 보내주었으며, ‘형평사’를 조직해서 전국에 백정 차별이 잘못되었음을 알렸다. 구습에 따르는 사람들이 강상호를 비난하며 ‘신백정’이라 불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형평사 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인권운동이었다. 그러나 강상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인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백정이라는 개념과 사회적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건 한국전쟁과 산업화로 사회구조가 송두리째 바뀐 뒤였다.
민족을 위해 투쟁하는 동안 강상호는 많은 재산을 잃었다. 사회운동에 돈을 아끼지 않았고, 고향 마을 전체 세금을 10년이나 대납해 주었으니 재산이 줄어든 것은 당연했다. 해방 이후 자식들을 교육시킬 돈도 없을 정도였다. 1957년 강상호가 죽었을 때 진주 시내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백정들로 가득했다. 덕분에 장례는 9일장으로 치러졌다. 20살 약관의 나이부터 민족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친 영원한 청년에 대한 깊고도 깊은 애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