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청년들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청년들
청년이란 개념은 19세기 후반에 등장했다. 1897년 미국 감리교 한국선교회가 조직한 단체 이름이 바로 대한중앙청년회였다. 이듬해부터는『독립신문』에 청년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10대 학생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젊은이를 가리키는 청년이란 말이 널리 퍼진 것은 을사늑약이 체결될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청년은 나라를 지키거나 되찾기 위해 제일 먼저 계몽되어야 하는 세대로 주목을 받았다. 혈기 넘치는 청년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3·1운동, 청년의 발견
3·1운동에서 청년은 시위를 촉발하고 확산시킨 주역이었다. 3월 1일 첫날부터 청년들은 서울·평양·진남포·안주·진남포·의주·선천·원산에서 학생으로서, 종교인으로서, 혹은 민중으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적극 참여했다. 전국으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과정에서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항쟁했다. 결사단·혈성단·조치원청년단·철혈청년단이 대표적인 청년비밀결사들이다.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는 3월 11일 20대의 천도교 청년인 구중회의 주도로 24명이 결사단을 조직했다. 3월 13일 오후 2시에는 그중 23명이 모여 ‘정의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대한독립을 한사코 전취할 것을 맹세’하는 「결사단원맹서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거리에서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단행했다.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에서 3월 하순 결성한 혈성단은 20대 농촌 청년들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한 다음 동지를 규합해 3월 28일 용유면 관청리 광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주도했다. 또 경기도 조치원 청년들은 3월 1일 서울에서 시위를 목격하고 비밀결사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바로 조치원청년단이다. 조치원 장날인 3월 30일 조치원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철혈청년단은 4월 평안남도 평양에서 청년들이 만든 비밀결사로「임시정부 선포문」, 「국민대회 취지서」 등 임시정부 관련 문건들을 인쇄해 평양과 주변 지역에 배포했다.

조선청년총동맹 창립 기사(『동아일보』, 1924.04.21.)
청년운동시대, 사회주의에 뛰어들다
3·1운동 이후 청년은 신시대를 이끌어갈 주인공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청년은 사회를 개조하고 계몽하는 문화운동의 선봉대이자 신문명 건설자였다. 또한 청년은 민족과 사회의 운명 자체와 동일시되었다. ‘조선의 현재와 미래는 청년에게 있다’는 것이다. 청년에 대한 기대는 청년운동에 대한 기대이기도 했다. ‘지방에 교육열을 완성하도록 하고 신사상을 확립하도록 하며 경제적 권리를 회복하게 하는 모든 운동의 중심이 곧 청년이며 청년단체’이기 때문이었다. 3·1운동 후 제한적이나마 결사의 자유가 허용되자 청년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20년에서 1921년 사이에만 1,300개 이상의 청년회가 생겨났다. 청년회 설립 붐이 한창이던 1920년 12월에는 최초의 전국적인 청년운동단체인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창립했다.
1920년대 초반부터 사회주의가 확산되자 청년은 시대 변화에 민감한 세대답게 이를 빠르게 수용했다.1922년 10월에 결성한 무산청년회는 사회주의적 개념인 ‘무산’을 청년회 이름에 붙인 것인데, 무산청년회가 내놓은 「무산청년선언문」에 따르면 무산청년은 ‘먹지 아니면 살아갈 수 없으면서 먹으려 해도 먹을 수 없는 재산 없는 청년’을 뜻했다. 당시 사회주의는 유행성 감기처럼 번져갔다. “입으로 사회주의를 말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사회주의에 푹 빠진 청년들을 그때는 ‘마르크스보이’, ‘엥겔스걸’이라고 불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관여한 박헌영·김단야·임원근이 마르크스보이로 유명했다. 모두 20대 중반의 청년들이었다. 엥겔스걸로 불린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1924년에 만든 최초의 단체는 조선여성동우회였다. 여기에 참가한 박원희·허정숙·정칠성·정종명 등도 모두 20대 중후반이었다. 남녀 사회주의자 간의 연애는 ‘붉은 연애’라고 불렀다. 앞서 나온 임원근과 허정숙도 붉은 연애의 주인공이었다.
1920년대 중반에 오면 사회주의는 청년운동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1924년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와 서울청년회, 신흥청년동맹 등 전국의 223개 청년운동단체가 결집한 조선청년총동맹이 창립했다. ‘대중을 본위로 한 신사회를 건설하고 조선 민중해방운동의 선구가 될 것’임을 앞세운 조선청년총동맹의 결성은 ‘청년운동의 통일을 상징하는 동시에 민족주의적 운동에서 사회주의적 무산계급운동으로 청년운동이 전환했음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다.

박재혁

윤봉길

최수봉

김익상
의열과 애국의 청년, 일본의 심장을 겨누다
청년들은 국외에서도 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와 집회허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국내와는 차원이 다른 싸움을 했다. 총을 쏘거나 폭탄을 던지며 목숨을 건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11월 만주 지린에서 22세의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에서 ‘의’는 정의를, ‘열’은 맹렬함을 뜻했다. 정의를 맹렬히 실현하고자 한 의열단은 암살과 파괴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20대 청년이 주축을 이룬 의열단의 활약은 대단했다.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에게 폭탄을 던진 박재혁, 밀양경찰서 안에 폭탄을 던진 최수봉,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폭탄을 던지고 유유히 사라진 김익상은 거사 당시 모두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한인애국단원으로 1932년에 의열투쟁을 벌인 이봉창과 윤봉길 역시 청년이었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그가 사형 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질 때 나이는 33세였다.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거행된 일본의 전승기념 겸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졌다. 그는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에서 19세부터 야학을 설치하고 농민독본을 집필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매진했다. 23세가 되던 1930년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마침내 뜻을 이뤄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 사령관을 비롯한 일본 요인 7명을 사상케 한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였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활약은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를 이끄는 장제스는 임시정부 국무령인 김구와 회담을 갖고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윤봉길의 말에 따르면, 의열투쟁은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세계에 한국인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투쟁이었다. 또한 일본 정치인들과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해 결국 식민통치를 포기하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품고 있었다.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은 무차별 살상을 의도하거나 실행한 적이 없었다. 그들의 표적은 적의 수뇌부였지 무고한 민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청년들이 의열투쟁을 통해 바란 목표는 독립을 이루어 인류 평화에 기여하는 데 있었다.

부민관 의거의 주역들. 왼쪽부터 강윤국·조문기·유만수
불사조의 청년 정신, 저항의 불씨를 잇다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1920년대에 청년의 기상을 떨쳤던 지식인들은 하나둘씩 일본의 편에 섰다. 청년들은 선배들의 전향과 변절에 반발했다. 윤치호가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중앙기독교청년회를 친일단체로 변질시키려 하자, 청년회원들은 투서 방식으로 전향을 비판했다. 나아가 청년들은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독립의 희망을 전했다. 비밀리에 전단지를 만들어 전국 곳곳에서 “우리 조선을 세우자, 조선 청년아, 싸워라”라고 독려했다. 중일전쟁 이후 치안유지법 위반자 중에는 청년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이어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청년들 사이에서 무장독립을 지향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일본군에 끌려가 전사하는 개죽음을 피하고자 무장투쟁을 꿈꾸며 만주로 건너간 청년도 있었다. 전국 각지 깊은 산에서는 징병과 징용을 피해 올라간 청년들이 무장훈련을 했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사람도 물자도 강제동원 당해야 했던 암울한 시절, 청년들은 의열투쟁을 계속했다. 1945년 7월 24일,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부민관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조문기·유만수·강윤국이 연단 밑에 설치한 시한폭탄이 터지면서 친일파 박춘금이 주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중단되었다. 해방을 목전에 둔 그 순간까지 한시도 저항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던 불사조의 청년 정신을 보여준 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