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로 읽는 역사

조선 청년, 적의 심장부에서

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INPUT SUBJECT
    



글 김경미 자료부


조선 청년, 적의 심장부에서

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2·8독립선언과 도쿄 유학생의 삶


  

3·1운동에 한 달 앞서 독립만세를 외쳤던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들이다. 그들은 한반도도 아닌 일본의 중심, 도쿄에서 당당히 대한의 독립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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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의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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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개최한 춘계육상운동회 기념사진(1917.04.08.)



일본을 물들인 조선 청년들의 외침

191928, 제국 일본의 수도 도쿄에는 보기 드문 눈이 펄펄 내렸다. 오후 2, 간다(神田)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조선인 유학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단상에는 비단 천에 쓴 독립선언서가 걸리고,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조선독립 선언식이 거행되었다. 먼저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이어 독립을 이룰 때까지 일제에 대해 영원히 혈전을 벌이겠다는 결의문이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채택되었다. 350, 모임을 감시하던 사복경찰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관대에 학생들은 맨손으로 저항하다 차디찬 눈길을 맨발로 끌려갔다.

관할서인 니시간다(西神田)경찰서의 취조 결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표자 11인 중 도쿄 유학생의 독립선언을 외국 언론에 알리는 임무를 맡고 중국으로 떠난 이광수를 제외한 10명이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후 불기소로 풀려난 최근우 외에 재판 결과 9명은 출판법 위반으로 9개월과 7개월 15일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도쿄감옥에 투옥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적의 심장부에서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다. “사진01”은 감옥에 갇혔던 2·8독립선언 대표자들이 모두 출소한 뒤인 19204월경에 찍은 것이다. 가운뎃줄이 그들로, 왼쪽부터 최팔용·윤창석·김철수·백관수·서춘·김도연·송계백이다. 송계백은 7개월 15일형을 받았으나 복역 중 병으로 형 집행정지가 되어 19191225일부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요양 중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9개월 형을 받아 326일 만기 출감했다. 7개월 15일 형으로 29일 만기가 되어 앞서 출옥한 김상덕과 이종근은 사진에 없다. 김상덕은 출옥 후 중국으로 떠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투옥을 피한 이광수와 최근우는 이미 1919411일 임시정부 수립 때부터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출옥한 대표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독립선언 준비를 도우며 대표자들이 체포된 뒤에도 제2차로 운동을 계속 진행하고자 했던 학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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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학회 기념사진(19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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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지광』 제13호 (1917.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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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 2·8독립선언 대표자의 인적사항(일본 경찰의 1919년 2월 10일 보고서)



조선인 유학생의 삶과 고민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이들은 청운의 뜻을 품고 공부를 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 이역만리 일본 땅까지 간조선 청년들이었다. 식민지가 된 조선에 고등교육기관이 제대로 없었던 상황에서 근대적인 국가로 성장하여 조선을 침탈한 일본은 새로운 지식의 보고였다. 1918년 말 현재 재일조선인 유학생 총 수는 769명이었고 그 가운데 642명이 도쿄에 거주했다. 도쿄 유학을 떠나는 청년들은 대개 고향에서 출발하여 아침 일찍 경성역에서 급행열차를 타고 저녁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관부연락선으로 갈아타고 다음 날 아침 시모노세키항에 내려 도쿄행 열차를 탔다. 30여 시간이 걸려 이튿날 밤 도쿄역에 도착하면 기다리고 있던 고향 또는 학교 선배들이 안내해 주는 숙소에서 도쿄의 첫날밤을 보냈다. 이들은 일본어와 영어, 수학을 익히고 대학 진학에 필요한 학력취득을 위해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와 같은 중등학교에서 1년 가량 공부한 후 와세다(早稻田)대학·게이오(慶應)대학·메이지(明治)대학 등에 입학했다.

유학생 중에는 집에서 매달 학비를 보내주어 한 달에 10원 하는 하숙비를 내고 책도 사 볼 여유가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간신히 여비만 마련하여 도쿄에 와서 식비가 싼 조선총독부 유학생 감독부 기숙사에 머물며 고학으로 학업을 이어가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일본학생과 경쟁하며 자신의 실력을 기르고 세계의 사상·정치적 동향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고자 했다. 전 세계의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도쿄에서, 그들은 멸망한 조국이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하며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자 했다.

이러한 열망을 충족시켜 주고 학교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동료애를 느낄 수 있는 장이 되었던 곳이 유학생단체였다. 대표적인 것이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로, 유학생 모두 반드시 이 단체에 가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학우회는 웅변회·졸업생 축하회·신도래학생 환영회·운동회 등의 행사를 개최하였다. 특히 많은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유쾌하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운동회에는 전 유학생들이 큰 관심을 갖고 참가하였다. 학우회는 이러한 행사뿐 아니라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여 유학생들에게 신사상을 보급함과 더불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학술단체였지만 일종의 비밀결사로 일본 경찰에서 조선인 단체 중 가장 위험한 모임이라고 보았던 조선학회에는 이광수·김철수·김도연·서춘 등 2·8독립선언 대표자들이 참가하여 활동했다.

이러한 유학생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다. 이들이 발표한 글이나 연설 내용은 철저하게 분석되었다. <>에서 볼 수 있듯이 2·8독립선언의 대표자들은 배일사상의 정도에 따라 갑호(甲號)와 을호(乙號)로 분류된 요시찰 조선인으로, 경찰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철저한 감시 하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감시 속에서도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이루어 볼 기회를 포착하게 되자, “민족을 구제할 자는 동경에 유학하는 우리 청년들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들 청년의 외침은 한반도를 비롯하여 한민족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졌던 1919년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