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포상을 받은, 받지 못한
그리고 잘못 포상된 독립운동가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
포상을 받은, 받지 못한
그리고 잘못 포상된 독립운동가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제79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가 포상(국가보훈처 제공)
해방 후 친일파 청산과 독립운동가 포상
1945년 8월 해방 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스스로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을 대우하지 않은 것, 그리고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소간의 냉전체제 속에서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는 3년이 지나서야 이념을 달리하는 각기 다른 정부를 세웠다. 1948년 9월, 늦게나마 친일파 처단을 위해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안타깝게도 1년도 채 되지 않아 와해되고 말았다. 미군정 이후 대거 등용된 친일파가 반공세력으로 변신에 성공한 뒤 이승만의 정권장악과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한 결과였다.
독립운동가 포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수립 후 1949년 4월 ‘건국공로훈장령’이 제정되고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이 최초로 최고 등급인 1등급을 수여 받은 것을 마지막으로, 10여 년 동안 이승만 정권하에서 더 이상의 포상은 없었다. 친일파 처단이 미완성으로 끝맺은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1962년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독립운동가 포상이 이뤄졌다. 이는 조선시대 효종과도 비교된다. 소현세자가 죽고 왕위에 오른 효종은 왕권의 발생 가치가 법통에 어긋난다는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그는 궁리 끝에 병자호란의 원수인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벌론을 제기하여 당시 백성의 호응을 얻고 불안한 왕권을 안정시켰다. 박정희는 정권 발생 가치의 하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일 경력까지 감추고자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독립운동의 의미를 강조하고, 독립운동가 포상도 재계한 것이다.
1962년 문교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의 주관으로 김구·안중근·윤봉길 등 204명이 포상을 받았다. 이후 1963년 내각사무처, 1968년 총무처를 거쳐 1977년 비로소 지금의 국가보훈처가 주관 부처로서 독립운동가를 포상하고 있다. 또한 1967년 2월 상훈법이 제정되어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국가유공자 전반에 걸쳐 포상이 이뤄졌다. 이때 건국공로훈장은 등급별로 차등을 두어 건국훈장·대한민국장·대통령장·국민장 등으로 구분되었다. 1990년 1월에는 상훈법이 개정되어 국민장이 독립장으로 바뀌었고 애국장, 애족장 등 훈장 등급이 증설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외에도 건국포장과 대통령표창을 포함하여 모두 7개 등급으로 나뉘어 포상이 이뤄지고 있다.
독립운동가 포상은 1962년·1963년·1968년·1980년·1982년·1986년에 비정기적으로 진행되었다. 1963년 제3공화국 출범, 1968년 3선 개헌,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2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동, 1986년 대통령직선제 개헌 문제 등이 제기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1990년 이후 매년 3·1절과 광복절 그리고 경우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일(4.13)*이나 순국선열의 날(11.17)에도 포상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2019년 1월까지 전체 포상된 독립유공자는 15,180명에 달한다.

김원봉과 아내 박차정의 결혼기념 사진
우리가 외면했던 독립운동가
그런데 15,180명에는 누구나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는 인물들이 적지 않게 빠져 있다. 몇 해 전 개봉된 영화 <암살>(2015, 최동훈 감독)은 1,200만 명, <밀정>(2016, 김지운 감독)은 750만 명이 관람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 영화는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 활동을 그린다. 영화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주목받은 김원봉은 포상을 받은독립운동가가 아니다. 1948년 친일파 정권이 활개 치던 상황에서 월북하여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결국 그는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면서 남과 북 모두에게 외면을 받는 독립운동가로 남았다. 얼마 전 개봉한영화 <말모이>(2019, 엄유나 감독)의 실제 주인공 이극로는 백과사전에 한글학자·북한의 정치인이라 규정되어 있다. 그는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하지만 1948년 월북한 뒤로 북한에서 활동하였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독립유공자를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항거한 인물”로 규정한 것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뿐만 아니다.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문서자료가남아 있지 않거나 정부가 정한 포상 기준이 너무 엄격하여 대상에 포함되지 못한 경우도 많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2018년 4월 정부는 포상 심사 기준을 개정했다. 이는 ▲ 3개월로 되어 있던 최소 수형·옥고 기준을 폐지하여 3개월 이하라도 독립운동으로 인해 옥고를 치른 경우▲ 독립운동 참여 때문에 퇴학을 당한 경우 ▲ 실형을 받지 않았더라도 적극적인 독립운동 활동 내용이 분명한 경우 등이 골자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지만, 사료 입증이 되지 않아 서훈 심사에서 번번이 탈락하여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는 것도 풀어야 할또 하나의 숙제이다. 이외에도 한 사람의 공적을 놓고 두사람에게 이중으로 포상하게 된 소위 ‘가짜 독립운동가’문제, 새롭게 친일 경력이 드러난 포상 독립운동가 등의 삭훈(削勳) 문제 또한 엄격히 해야 한다.
공정하고 형평성 있는 포상 심사는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정신과 행동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가 된다. 독립운동가는 자연스럽게 국민 누구나 존경하고 기리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자꾸만 이타심이 작아지는 지금의 우리에게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고아한 기상과 바른 정의는 끊임없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해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로 보고 기념식을 거행해왔으나, 2019년부터 임시정부가 국호와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내각을 구성한 4월 11일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