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한인 단체의 결성과 통합 기운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한인 단체의 결성과 통합 기운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대개 농장 단위로 분산되어 생활하였다. 분산된 농장에서 한인들은 10여 명 이상이 모인 곳에동회(洞會)를 조직했다. 한인들 간의 질서와 친목, 그리고 상호부조와 권익 신장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동회는 대개주민 회의에서 투표로 선정하는 동장과 동장을 보좌하는 총무, 서기, 사찰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자치 규정을 정해 자치활동을 전개했다. 즉, 친목을 강화하고, 부녀자들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도박·음주와 부정한 행위를 금지하였다. 규율을 위반한 자에게는 1~2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는 시행규칙도 있었다.

에와친목회에서 주관한 광무황제탄신기념행사(1907)
하와이 내 민족운동 단체
농장 단위별로 결성된 동회 외에 민족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인 단체들이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결성되었다. 하와이 내 최초의 정치 단체는 1903년 8월 호놀룰루에 설립된 신민회(新民會)이다. 안정수·윤병구·홍승하 등이 참여했다. 구국을 위한 동족 단결과 민지계발, 국정쇄신을 목적으로 설립하였으나 설립이념인 ‘신민’과 ‘국정쇄신’이 대한제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반역 집단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1904년 4월 해체되었다.
신민회 해체 이후 오하우섬 에와농장에서 노동하던 정원명·윤병구·김성권·이만춘·김규섭 등이 에와친목회를 결성하였다. 공식 명칭은 ‘예와친목회(禮?親睦會)’인데 농장 이름을 따서 편의상 에와친목회로 부른다. 설립 목적은 항일운동을 위한 일화(日貨) 배척과 동족 간의친목과 권익 보호였다. 초대 회장은 정원명이고 백일규가서기를 맡았다. 에와친목회는 공립협회의『공립신보』를 부러워했다. 백일규, 조영노 등 6명이 연명으로 『공립신보』에 보낸「기서」(1905.12.21)에 따르면 “오직 신문은 실로 사람의 큰귀와 눈이라 신문을 박람하면 세계에 듣지 못하던 바를들으며 보지 못하던 바를 본다” 하고 “그런데 지금 우리한인들은 신문을 보기보다 주색잡기의 장으로 가서 시간을 낭비한다”는 한탄의 글을 남겼다. 언론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에와친목회는 하와이 한인 단체 처음으로 1906년 5월 1일 『친목회보』를 발간했다.
에와친목회 결성 이후 하와이 각지에서 한인 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겼다. 와이파후공동회(1906.3, 안원규)·혈성단(1906.5, 공덕화)·자강회(1906.6, 고석주·손창희)·공진회(1906.12, 민찬호)·노소동맹회(1907.2, 정병섭)·의성회(1907.2, 임재규)·국민동맹회(1907.3, 채극여)·국민단합회(1907.7, 김이원)·신간회(1907.7, 김성옥)·실지회(1907.7, 박승렬)·부흥회(1907.8, 전백현)·전흥협회(1907.9, 김익성) 등 약 24개의 단체와 지회들이 대동단결과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공립협회 창립회원(앞줄 왼쪽부터 송석준·이강·안창호, 뒷줄 임준기·정재관)
미국 본토의 한인 단체
미국 본토에서 처음으로 한인 단체가 결성된 것은 1902년 9월 4일 유학을 목적으로 한국을 떠나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에 의해서다. 그는 이대위·김성무·박영순 등과 1903년 9월 22일 환난상부 및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상항친목회를 설립했다.
하와이에서 한인들이 대거 미 본토로 이거해 오고 1905년 1월부터 샌프란시스코의 백인 미국인들이 일본인 배척운동을 전개하며 동양인을 압박하자 보다 조직적인 자치기관이 필요해졌다. 그런데다 1905년부터 일본이 호놀룰루 주재 일본총영사를 대한제국 명예총영사로 임명하여 미주 한인들을 통제하고 동년 4월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마저 금지하려 하자 민족운동을 위한 단체가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들은 1905년 4월 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항일운동과 환난상부를 목적으로 공립협회를결성했다. 초대 총회장은 안창호가 맡았고 송석준·임준기·이강·임치정 등이 참여했다. 공립협회는 자치기관이자 항일민족단체로서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필두로 리버사이드·레드랜드·로스앤젤레스·락스프링스·솔트레이크시티·새크라멘토·핸포드·프레스노 등지에 지부를 결성하여 북미 최대의 단체로 발전하였다. 자체 기관지로 1905년 4월 22일 창간한 『공립신보』가 있다.
공립협회 결성 직후인 1905년 12월 9일 캘리포니아주의 파사디나에서 구국을 위한 교육운동을 목적으로 대동교육회가 결성되었다. 회장은 이병호, 총무는 장경이맡았다. 대동교육회는 1907년 1월 교육과 함께 실업을 장려해 나라의 국권을 보존한다는 취지로 대동보국회로 재편되었다. 1907년 10월 3일 기관지로 『대동공보』를 발행하였고, 7개의 지방연회를 가지는 등 공립협회와 쌍벽을 이루었다. 1907년 7월 25일 뉴욕에서 안정수·신성구·서필순·이원익 등이 동족상조와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공제회를 결성했다. 공제회는 동년 8월 헤이그에서 특사 활동을 마치고 뉴욕에 온 이상설과 이위종을 환영하였고 일본 영사의 한인 감독권을 배제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년 11월24일 시애틀에서 이정실·김익제·박용하 등이 항일 구국을 목적으로 취지서를 발표하고 동맹신흥회를 결성했다.
한인 단체의 통합 기운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인 단체들은 을사늑약과 일본의 통감통치, 헤이그 특사 활동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퇴위시킨 일련의 치욕스러운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항일구국을 위한 단체 통합과 새로운 민족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움직임은 하와이 내 한인 단체 통합운동의 기운을 불러일으켰고, 미국 본토에서는 대한신민회 조직을 발기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