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2·8독립선언의 열기를
국내로 전파한 김마리아

글 전시부
2·8독립선언의 열기를
국내로 전파한 김마리아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김마리아를 2019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의 열기를 확산시키고 이후 여성독립운동 단체를 통해 활발한 독립운동 활동을 이어갔다.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하다
김마리아는 1892년 황해도 광산에서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계몽운동과 구국 활동에 힘쓰던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민족의식을 키웠다. 부친이 세운 소래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교사가 되어 교육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대 일제 침탈이 본격화되자 독립의 기틀 마련을 위해 1914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1918년 국제 정세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이듬해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알려지자 재일한인유학생들은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2·8독립선언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1919년 2월 8일 김마리아는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였고, 이후 일본경시청에 연행되어 일주일간 취조를 받았다. 김마리아는 도쿄에서의 독립운동 기세를 국내로 확산시키기 위해 2월 17일 현해탄을 건너 조국으로 향하였다.
여성 독립운동 활성화에 기여하다
김마리아는 독립선언문을 감춘 채 조국으로 돌아와 거족적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누볐다. 그러던 중 3·1운동 소식을 듣고 후속 활동 논의를 위해 서울에 도착하였지만 3·1운동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어 일경에 붙잡혔다. 6개월 후 출감한 김마리아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여성 독립운동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직원의 배신으로 다시 일경에 체포되고 이듬해 5월 혹독한 고문으로 병을 얻은 채 출감하였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김마리아는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에 힘을 보탰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는 등 다방면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1923년에는 미국 유학을 떠나 여성 독립운동단체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는 등 독립을 위한 노력을 이어나갔다. 정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김마리아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8독립선언이 진행된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의 모습

신문에 실린 2·8독립선언 기사(『독립신문』, 1919.08.26.)

2·8독립선언서 (1919.02.08.)

미국 파크 대학 시절 김마리아의 사진

원산의 마르타 윌슨 여자신학원에서 강의하던 시절의 김마리아로, 앞줄 왼쪽 끝에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유학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온 김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