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의 발자취를 찾아서

멀리 돌아 가까이서 찾다

멀리 돌아 가까이서 찾다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


멀리 돌아 가까이서 찾다


김상윤 기념비에 대한 상념에 젖어 있을 때 차는 벌써 취안저우(泉州) 시내에 들어왔다. 볶음밥으로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저녁에는 삼겹살로 일행들의 배를 채우겠다고 공언했다. 다음 행선지는 정화암(본명 정현섭)의 자서전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에 나오는 취안저우 중산공원(中山公园)이었다.



드디어 찾은 여명고급중학교의 옛터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이곳은 ‘일화(日貨)배척운동’ 등 시민대회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정화암은 이강과 이기환의 체포로 불만이 팽배해진 취안저우지역 중국인들의 불만을 항일로 승화시키기 위해 일본인 선원을 체포하여 중산공원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규탄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차가 중산북로 초입을 지나는 순간 왼쪽으로 여명직업대학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차 싶었다. 저것이 여명고급중학교의 후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00여 미터 뒤에 차를 멈추고 조영일씨에게 확인을 부탁했다. 권오수 선생은 카메라에 연신 중산공원을 담았고, 조원기 연구원도 큰 덩치에 작아 보이는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전문가처럼 이리저리 돌려가며 찍고 있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조영일씨가 허겁지겁 중산공원 쪽으로 왔다. 예상대로 여명직업대학이 여명고급중학교의 후신이 맞다고 했다.확인을 위해 우리는 곧바로 학교로 향했다. 학교 정문 앞에는 취안저우 시문물관리위원회에서 1984년 6월에 건립한 ‘천주여명고중유지(泉州黎明高中遺趾)’ 기념비가 떡하니 버티고 서있었다. 여명고급중학교의 옛 건물을 어렵게 찾았다는 안도감이 몰려 왔다. 경비는 친절하게도 교문 진입을 허락했다. 교문에 들어서자 큰 고목이 정면에 버티고 있었다. ‘학교의 역사가 나다’ 라고 외치는 듯한 형상이었다. 오른쪽에는 여명교학루(敎學樓)가 오래된 건물의 풍채를 뽐내고 있었다. 이곳 어딘가에 유자명을 비롯하여 유서, 정치화 등 한인 교사들의 체취가 온기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참을 교내에서 서성거렸다.이렇게 취안저우의 악천후를 뚫고 공식 답사의 첫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약속대로 일행을 삼겹살 구이 집으로 안내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은 우화로우(五花肉)라고 하는 삼겹살이다. 김영일 가이드가 시내에서 삼겹살 구이를 파는 집을 찾았다. 주인은 한족이었고, 다행스럽게도 이곳에서 파는 우화로우는 김치 삼겹살이었다. 비를 맞아가며 김상윤 기념비를 찾아 나섰던 일을 회상했다. 그렇게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의 밤은 깊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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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안저우 중산공원(中山公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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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여명고중유지(泉州黎明高中遺趾) 기념비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지를 찾아 나서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일정을 점검했다. 취안저우 민단에 관한 답사인데, 걱정이 앞섰다. 한국 아나키즘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정화암 등은 민단을 조직해 한중연합체제를 운영하고자 했다.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는 중국 공산당과 직접 관련이 없기 때문에 사무소가 온전할 것 같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봤을 땐 민국(民國) 시기 공산당 관련 사적은 그런대로 잘 보존되었지만 그밖의 것은 다소 소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숙소를 나섰다.정화암은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이후 1921년 10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4년부터는 이회영·신채호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다. 무력투쟁을 통해서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군자금 모집에 열성을 기울였다. 이러한 가운데 독립운동의 평생 동지 백정기가 결핵으로 입원하게 되고, 정화암은 그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취안저우로 오게 되었다. 그 과정을 그의 회고록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를 통해 살펴보자.

1929년 11월 나는 취안저우에 도착하여 그들과 진지하게 방안을 논의하였다. 우선 며칠 동안은 1928년 봄에 민단에서 같이 일을 했던 관계로 그곳 동지들의 도움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오랫동안 혜택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그곳 동지들의 권유에 따라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강연을 하기로 했다. 마침 당시의 그곳은 제남사건(濟南事件) 이후 반일사상이 팽배하던 때라 그곳 동지들이나 주민들은 우리 민족의 반일운동의 현실, 특히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밝히고 그 후의 민족운동 실태를 알고자 하던 때다.

정화암은 취안저우 어느 곳에서나 항일 강연을 했다. 취안저우에서 민단사무처를 운영하던 경험이 그대로 표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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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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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암 회고록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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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암 육성 증언 릴 테이프



답은 가까이에 있다

우리 일행은 정화암의 활동무대를 그리면서 정화암이 운영했던 민단사무처를 찾아 나섰다. 취안저우는 아주 오래된 역사문화도시다. 푸젠성의 동남해에 위치하고 있고, 아열대기후에 속하기 때문에 여름에 갑자기 돌풍이 불거나 비가 오는 스콜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먼저 천추도서관에 도착했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들어가, 한국독립운동과 민단 관련 자료를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시간 제약으로 더 오래 있지 못하고 곧 다음 행선지인 천주화교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만족할만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이렇다 할 문헌자료가 없을 때 가장 확실한 조사방법은 탐문이다. 특히 나이 많은 현지 지식인을 찾는 게 급선무다. 민단편련처는 정화암·이정규·이을규 등이 중국인 진망산 등과 활동했던 한중합작처다. 따라서 이곳을 찾아내는 일은 한국독립운동의 잊혀 있던 부분을 복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나이 많은 분들에게 취안저우의 민단에 대해 문의하던 가운데 뜻밖에도 취안저우 행정공서가 바로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연치고는 기막힌 필연 아닌가. 이성대주점, 그곳이 바로 민단편련처 사무실이었다. 지금은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많은 이들이 이곳을 알고 있었다. 취안저우에서 보낸 이틀간의 답사는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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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대주점(옛 취안저우 민단편련처)


고랑도와 이강의 악연
이번 답사는 비와 동행한 답사였다. 무엇보다도 광저우는 파란 하늘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푸젠성 취안저우는 스콜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다행히 샤먼(厦門)은 화창하게 갠 맑은 하늘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다음날 오후 2시, 고랑도로 가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왕복표를 구입한 후 배에 오르기 위해 줄을 섰다. 두 개 층으로 구성된 배는 한번에 300명 이상을 태웠다. 2층에는 1위안을 주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상술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5분 정도 지나 배는 고랑도에 도착했다. 그곳도 유람을 온 사람들로 섬 전체가 북적였다. 이제 우리가 찾아갈 곳은 독립운동가 이강이 체포 구금되었던 샤먼 일본영사관 감옥 건물이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