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살피다

개인의 삶이 모여
역사를 이루다

개인의 삶이 모여 <BR />역사를 이루다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개인의 삶이 모여 역사를 이루다


역사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국토와 국가주권을 잃어버린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결단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온몸으로 써내려간 역사는 오늘에 이르러 우리 민족만의 이야기, 독립운동사로 기록되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

조선 최고의 명문가 출신인 이회영은 전 재산을 팔아 여섯 형제와 일가족 전체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국외 항일운동 전반에 관여한 바, 특히 신민회 창설을 주도, 신흥무관학교 건립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1907년 일본은 정미7조약을 통해 사실상 조선의 내정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바로 그해에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가 탄생했다. 이회영을 비롯하여 이시영·이상룡·김동삼·김대락 등 신민회 회원들 중에는 당시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개인 집안의 재산을 정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신민회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주의를 최초로 표방한 점이다. 5백 년을 넘게 이어온 조선왕조의 역사와 대한제국 황제의 존재를 생각했을 때, 국민이 국가의 대표를 직접 선출하는 체제를 지향한다는 것은 당시 충격적인 발상이었다. 둘째는 독립전쟁론에 의거하여 만주에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점이다.이회영은 형제들을 설득해 오늘날 기준으로 약 600억 원에 이르는 재산을 급매하고, 가족 수십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 추가가라는 지역에 정착이 어려워지자, 당시 중국 최고 지배자였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직접 담판하여 삼원보 지역을 얻어낸다. 이후 이곳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고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함께 경학사·부민단 등 자치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약 2천여 명의 독립군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신흥무관학교는 이후 북로군정서·서로군정서 성립과 1920년대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에도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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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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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학생들과 백서농장 광경

         


           

무력투쟁의 상징, 김원봉과 의열단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자’. 1919년 11월 김원봉은 지린성(吉林省])에서 무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을 결성했다. 당시 만주와 중국 관내지역에 있는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소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판단한 그는 암살과 파괴 등 직접적인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1920년 의열단은 첫 번째 활동으로 ‘제1차 암살 파괴 계획(밀양·진영폭탄반입사건)’을 모의,  단원 전원이 식민지 주요 기관에 대한 폭파 및 총독부 주요 인사들에 대한 처단 작업을 준비한다. 4월에 폭탄 3개, 5월에 폭탄 13개·권총 2정·탄환 10발을 국내에 반입하였고, 10여 명이 국내에 잠입해 서울·부산·마산·밀양 등에서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밀정의 제보로 거사를 불과 며칠 앞두고 의열단원 20명이 검거되고 폭탄을 전부 압수당하면서 실패하고 만다.좌절도 잠시, 그해 9월 14일 상하이에서 출발한 단원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서 폭탄을 터뜨려 건물을 폭파하고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를 처단했다. 이어 12월 27일에는 친구 김상윤의 권유로 의열단에 입단한 밀양 출신 최수봉이 폭탄 2개를 밀양경찰서에 투척, 건물 일부를 파손하였다. 이외에도 의열단은 1921년 기계노동자 출신 김익상이 활약한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 1922년 김익상·오성륜·이종암이 육군 대장 다나까 기이치를 암살하려고 한 황포탄 의거, 1923년 제2차 암살 파괴 계획, 1924년 도쿄 니주바시 폭탄투척 사건,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 독립을 위한 적극적인 투쟁을 이어나갔다. 의열단이 계획한 거사는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이어나간 투쟁은 우리 국민들 가슴에 독립이란 희망의 불씨를 태우게 했다. 이름 그대로 정의를 맹렬히 실행에 옮겼던 의열단, 이들의 목숨을 건 투철한 독립정신은 1920년대 독립운동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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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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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투탄

의거를 다룬 기사(『동아일보』 1927년 1월 

13일자,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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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나라와 민족을 생각한 진정한 군인

한국독립군이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전쟁 가운데 1920년 6월 봉오동전투·1920년 10월 청산리대첩·1933년 대전자령전투는 독립전쟁사의 기념비적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이중 대전자령전투는 1930년대 무장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지청천이 세운 업적이다. 그는 군인 지도자로서 북만주에서 활동하며 쌍성보전투·대전자령전투·흥경성전투·사도하자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1930년 7월 동삼성 길림에서 홍진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한 지청천은 산하에 한국독립군을 편성하고 여기서 총사령관을 맡아 독립전쟁을 총지휘했다. 다음해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도발하면서 그는 중국군과 합세해 한중연합군을 결성하였다. 한국독립군은 중국호로군과 활동을 같이 했다. 지청천이 이끌던 부대는 보통 4백~5백 명으로, 이 시기 가장 인상적인 승전이 바로 대전자령전투였다. 당시 중국군 2천 명, 한국독립군 5백 명이 산림지대에 매복했다가 일본군 행렬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전투를 시작해 4시간 만에 거의 전멸시켰다. 군벌 3천 벌·대포와 박격포 10문·소총 1천5백 정·군량 등 군수물자 쟁탈 부문에서 한국독립군은 무장독립운동사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전투 상당수가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군과의 싸움이었는데, 대전자령전투의 경우 일본군을 대상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였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특히 일제는 만주국을 앞세워 본격적인 대륙침략과 한국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는 상황이었다.지청천은 광복을 맞은 뒤에는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을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원동력이 청년에게 있음을 강조하며 대동청년단을 결성하는 등 조국재건에 앞장섰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국과 국민에 대한 생각뿐이었던 지청천, 그는 진정한 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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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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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받고 있는 지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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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당 창당 기념사진(1940년 5월) 

           


           

여성혁명가 남자현

독립운동에는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의 활약도 주목해야 한다. 한국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민족수난의 시기에 구국정신을 발휘하였으나 남성독립운동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련 연구나 발굴이 부족한 상황이다.남자현은 기독교인으로 ‘여걸 남자현 선생’으로 불리며 의열투쟁, 계몽운동 등 만주 지역을 기반으로 그 어떤 남성독립운동가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남자현은 불과 24세에 홍구동전투로 남편 김영주를 일찍이 여의었다. 당시 첫 아이를 임신한 그녀는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지내다가 1907년 친정아버지 남정한과 함께 의병궐기에 참여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3·1운동 당시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으며, 경상도 만세시위 조직을 책임 맡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이후 1910년 만주 삼원보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와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서간도 독립운동의 중심지에서 활약했다. 1927년에는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 김문거로부터 권총 1자루와 탄환 8발을 받고 서울로 잠입했으나 때를 잡지 못하고 만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남자현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1931년 국제연맹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리턴조사단을 파견하던 당시의 일이다. 그녀는 소식을 듣고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혈서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를 쓰고, 이를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해 일제의 만행을 호소하였다.이후 1933년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식장에서 일본 고위 관료 암살에 착수한 그녀는 밀정의 밀고로 결국 일경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남자현은 성치 못한 몸으로 출소하여 만 60세에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세상을 떠난다. 유언에 따라 가지고 있던 돈 200원은 1947년 서울운동장에서 김구에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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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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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의 임종을 지켜보는 아들과 손자(독립혈사 제2권)

           

독립운동가 개개인의 삶은 모여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룬 역사가 되었다. 이들 역사적 영웅은 계급·성별·국적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계층 넘나들며 곳곳에서 등장하는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독립 쟁취를 위해 행동했다. 세세한 활동 시기도 지역도 방식도 다양했지만 이들이 하나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독립’이라는 시대적 소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단박에 한국사』,『역사 전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