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민간외교관 김순애
둘, 여성의병장 윤희순

하나, 민간외교관 김순애<BR />둘, 여성의병장 윤희순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글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김순애, 민간외교관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30여 개 동맹국이 모두 우리의 우군이 되어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있다. 정히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임시정부 소재지에 있는 혁명 여성들은 당파별이나 사상별을 묻지 않고 일치단결하여 애국부인회를 재건함으로써 국내와 세계만방에 산재한 우리 일천 오백만 애국여성의 총단결의 제일성이며, 삼천만 대중이 쇠와 같이 뭉쳐서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대한 독립과 민족해방 완성에 제일보를 삼으려 한다.”
- 1943년 2월 한국애국부인회의 재건 선언문 中 -

암울한 일제강점기 국외에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헌신한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재능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중 김순애는 출중한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한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이자 민족교육가였다.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김순애는 1889년 5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송천으로 낙향한 후 황무지 개간과 가축 사육 등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아버지는 이를 기반으로 황해도를 대표하는 자산가가 되었다. 일찍이 기독교를 수용한 아버지는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는 등 자녀들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그녀가 중등교육을 받는 데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김순애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상경하여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교사로 재직하였다. 오빠 김필순을 비롯한 형제들은 서울에서 많은 애국지사와 밀접한 교류를 가졌는데, 형제들의 형향으로 그녀도 우리 민족이 당면한 현실을 인식하고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식민지 노예교육이 강화되자, 김순애는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와 지리를 비밀리에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에 적극적이었다. 이를 탐지한 일경에 의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오빠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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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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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여학교 3회 졸업 기념사진(1909년, 뒷줄 오른쪽 2번째)

           

           

김규식과 영원한 동반자가 되다

이후 상하이를 거쳐 난징 명덕여자학원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형부인 서병호의 중매로 평생 동지인 김규식과 결혼한다. 망명지에서의 결혼은 운명적인 동시에 평생 뜻을 같이 하는 동지적 결합을 의미했다. 두 내외는 곧바로 상하이로 근거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당시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여운형·조소앙·김철 등은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였다. 김순애 부부는 망설임 없이 여기에 가입·활동에 나섰다. 이때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신한청년단은 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김규식을 선정하였다. 그리하여 김순애와 김규식은 상하이 부두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이별 아닌 이별을 맞았다. 남편의 파견과 동시에 김순애는 선우혁·김철 등과 국내로 파견되어 대대적인 독립운동 전개와 독립자금 지원 요청을 임무로 맡아 수행했다. 그리고 1919년 2월 부산에서 백신영·김마리아·함태영 등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를 파견한 소식을 전하였다. 이에 그들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리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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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식과 김순애(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다

한편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함태영은 국내에서 이미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이 계획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임순애 역시 거기에 동참하겠다고 하자, 그는 ‘그러다 잘못되면 파리에 가 있는 남편 김규식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러면 민족의 대업 완수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 설득해 3·1운동을 목전에 두고 그녀가 다시 상하이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후 김순애는 이화숙·이선실·오의순 등과 함께 조국 독립에 대한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일환으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회장으로 선출되어 선전활동과 독립자금 모금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서병호·이희경·안창호 등과 대한적십자사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독립전쟁에 시급한 현안인 간호원 양성과 임시정부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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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하이 애국부인회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보낸 문서

        

           

           

민간외교관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다
김순애는 중국에서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직접 학교를 찾아가 한중문제를 연설하는 등 중국 청소년들에게 한국이 처한 현실을 널리 알렸다. 1930년대 한중 연대는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미국의원단 방문 시에는 한국부인회를 대표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22년 상하이에서는 다나카 저격 미수사건으로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는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는 임시정부의 위상을 추락시킬 수 있는 불상사였다. 그녀는 영문으로 간절한 애도의 뜻과 기념품을 남편에게 전달했다. 스나이더는 “고상하고 혁혁한 귀회의 결의를 나는 늘 기억할 것이며, 이를 세상에 알리는 동시에 귀회에게 감사해마지 않습니다”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가해자에게 호의와 감사를 보낼 수 있도록 한 외교적인 수완은 독립운동사가 찬란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대동단결만이 독립운동의 초석이다
임시정부는 운동노선을 둘러싸고 내홍에 휩싸였다. 그녀는 수습을 위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을 미련 없이 사임하고, 남편 김규식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는 데 혼신을 다했다. 1930년 한인여자청년동맹 결성이나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등은 이러한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김순애는 대동단결이 독립운동의 가장 견고한 기반임을 거듭 밝혔다.
광복 후 귀국한 뒤로는 통일된 대한민국 수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1946년에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 1948년에는 평이사로 있다가 1962년 사임하였다. 그는 재임 중에도 항상 독립정신을 강조하는 참다운 교육가였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의병 노래를 지어 부른 여성의병장, 윤희순


윤희순은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다. 서울에서 윤익상의 딸로 태어나 16세에 유제원과 결혼했다. 시아버지 유홍석이 춘천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의병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섰으며, 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안사람 의병 노래’, ‘방어장’ 등 의병 노래를 짓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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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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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가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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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람 의병대를 만들다
1907년 의병항쟁 때 유홍석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자 윤희순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유인석의 부인을 비롯한 친척 부녀자들과 마을 여자들을 끌어 모아 서른 명쯤 앞에서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우리 안사람들이 나서야 합니다! ‘안사람 의병대’를 만들어 우리도 의병과 함께 싸웁시다. 의병들은 지금 무기와 양식이 부족해 전투를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자금을 거둬들이고 의병들의 뒷바라지를 합시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군사훈련도 받읍시다.” 그렇게 안사람 의병대가 만들어졌다.
여자 의병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의병 자금을 거두었다. 69명의 부녀자들에게 받은 돈은 모두 350냥이었다. 이것으로 놋쇠와 구리를 사, 무기와 탄약을 직접 만들었다. 쇠똥과 찰흙을 섞어 화약도 만들었다. 또한 남자 의병들과 더불어 고된 훈련에도 임했다.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대장으로서 훈련을 받을 때 의병들에게 자신이 지은 의병 노래를 부르게 해 사기를 북돋웠다.


역경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독립운동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가족을 따라 만주로 갔다. 이듬해에는 만주의 환인현 보락보진에 동창학교의 분교인 ‘노학당’을 세우고, 이곳에서 교장으로 지내며 독립운동을 했다.
연설을 굉장히 잘했던 윤희순은 ‘연설 잘하는 윤 교장’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녀는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조선 사람과 중국 사람들에게 자기가 지은 노래를 가르치고 일본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왜놈들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까지도 집어삼키려 합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왜놈들을 몰아내기 위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그러니 중국 사람들은 우리에게 양식과 터전을 주십시오.”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아 독립운동 자금을 내놓기도 했다.
만주에서는 불행한 일들이 잇달아 생겼다. 1913년 12월 시아버지 유홍석이 병에 걸려 세상을 뜨더니, 2년 뒤에는 남편 유제원이 일경에 붙잡혀 심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얼마 뒤에는 일제의 압박으로 노학당이 문을 닫게 되었다.
연거푸 닥쳐오는 시련과 고난에도 윤희순은 독립운동을 그만두지 않았다. 유돈상·유교상 등 아들들과 함께 대한독립단에 가입, 독립자금을 모으고 비밀문서를 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온 식구가 독립운동을 하기에 그녀의 가족은 ‘가족 부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 많은 인생을 노래에 담다
어느새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된 그녀는 1923년 1월 15일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고향을 떠나온 지 어언 10년이 넘었구나. 나라 잃은 설움이 이다지도 서러울까. 어느 때나 해방이 되어 고향에 갈 수 있을까. 슬프고도 슬프도다. 이 내 신세 슬프도다.’ 한숨을 푹푹 쉬며 신세타령을 하던 그녀는 그 마음을 그대로 옮겨 ‘신세타령’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우리 조선 어디 가고 왜놈들이 득세하나
우리 임금 어디 가고 왜놈 대장 활개 치나
우리 의병 어디 가고 왜놈 군대 득세하니
이 내 몸이 어이할꼬 어디 간들 반겨줄까
어디 간들 오라 할까 가는 곳이 내 집이요
가는 곳이 내 땅이라 슬프고도 슬프도다

슬프고도 서러운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조선 사람이 없었다.
1935년 윤희순의 맏아들 유돈상이 일경에 붙잡혔다. 만주 푸순(撫順)에서 조선독립단을 다시 만들어 활동하던 중, 처남인 음성국과 함께 옥에 갇힌 것이다. 그는 모진 고문 끝에 그해 7월 19일 숨을 거두었다. 맏아들마저 세상을 떠나자 윤희순은 원통하고 분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해주 윤씨 일생록』을 남겼다.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자손들에게 훈계하는 말을 적은 글이었다.

‘너희들은 우리 조상이 얼마나 큰 고생을 했는지 생각하고, 돈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지면 안 된다.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충효 정신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윤희순은 자손들에게 당부한 뒤 일체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1935년 8월 1일 76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