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 세계사
무너진 도시와
일으킨 자존심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
무너진 도시와
일으킨 자존심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반쯤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는 여인·그녀의 무릎 밑으로 보이는 시신의 한쪽 팔·뒤에서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군인.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선 그리스>는 그림만 보고서는 쉽게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없다. 이름에 등장하는 ‘그리스’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외젠 들라크루아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낯익은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선 그리스
(1826,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보르도 미술관)
여인과 그리스는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제리코(T. Géricault, 1791-1824)의 영향을 받았다. 자크 루이 다비드로 대표되던 신고전주의 미술에 반기를 들면서 등장한 낭만주의 회화는 무엇보다 화가의 상상력을 이용한 감성의 표현을 중요하게 여겼다. 들라크루아도 마찬가지. 그는 역사적 진실을 기반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현실감 넘치면서도 은유적인 그림을 그려냈다. 그렇게 탄생한 대표작이 바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그림은 1830년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프랑스 국기를 든 여인이 힘차게 민중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담고 있다. 여기서 여인은 민주주의의 ‘자유’를 상징한다. 그리고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선 그리스> 속 여인의 강인함은 자유의 여신과 닮아 있다. 이미 4년 전 들라크루아는 자유의 여신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루브르미술관)
그림은 1825년 터키군의 점령에 맞서 싸웠던 그리스 미솔롱기 지역의 독립전쟁을 주제로 한다. 당시 그리스 시민들은 터키군에 대항해 1년 정도를 버티다가, 그 또한 힘들어지자 광산을 폭파시켜 자멸했다. 여인이 밟고 있는 돌무더기 폐허는 바로 그때의 잔해들이다. 들라크루아는 무너진 폐허 속에 홀로 서 있는 여인의 이미지를 통해 비록 터키에 패배했지만, 끝까지 자존심과 신념을 지켰던 그리스인들의 고결한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다.
미솔롱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미솔롱기(Missolonghi)는 아테네 북서쪽 210km 지점에 위치한 인구 약 23만여 명의 자그마한 항구도시다. 역사적으로는 독립전쟁 당시 그리스인의 영웅적 항전지로서 이름이 높다. 특히 1822년 터키군대에 포위된 뒤, 1826년 여자와 노인을 포함한 약 3.000여 명의 시민들이 폭사할 때까지 도시를 사수했던 그리스 국민들의 곧은 자존심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고 도래한 오스만투르크 제국(터키) 시대. 당시 그리스는 투르크인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독립을 얻기 위해 저항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1814년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가 만들어지고, 1821년 오스만투르크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으며, 1822년 1월에는 그리스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는 그리스의 독립투쟁에 맞서 더욱 심한 탄압과 보복 학살을 자행했다.1825년 4월부터 투르크 군대가 포위하던 미솔롱기는 이듬해 4월에 함락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럽 각국에서는 터키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나아가 그리스 저항군을 자처하며 전쟁터에 뛰어드는 이들도 있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Byron, 1788-1824)이 대표적이다. 그는 평소 그리스를 좋아했는데, 그리스의 수비군으로 항전하다가 1824년 4월 말라리아로 병사했다. 미솔롱기에는 그의 동상(像)과 기념비가 남아 있다.들라크루아가 가장 존경하던 문학인이 바로 바이런이었다. 그래서 그림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선 그리스>는 그리스 독립에 대한 헌사임은 물론 바이런을 향한 존경과 애도였다.
고종환
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