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암흑의 1910년을 밝히다
별이 된 독립투사들

암흑의 1910년을 밝히다 <BR />별이 된 독립투사들

글 박영규

 

암흑의 1910년을 밝히다

별이 된 독립투사들

 


국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나섰던 감격의 그 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월간 『독립기념관』은 2019년 3월까지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을 통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1910년대 일찍이 독립운동에 나섰던 선구자들이 있다. 나철과 강우규, 이상설이 바로 그들이다. 비록 세 사람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지만, 시대를 밝히는 별이 되어 후대의 많은 독립운동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조국의 독립을 종교로 일군, 나철

1916년 음력 8월 구월산에서 단식하며 수도에 정진하던 한 남자가 호흡을 조절하여 스스로 절명의 길을 택했다. 그의 이름은 나철. 민족종교 대종교의 교주이자 독립운동가였다.나철의 본관은 나주로 호는 홍암, 본명은 인영이다. 1863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29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의 조선은 국권 침탈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나철은 기꺼이 구국 활동에 나섰다. 을사늑약을 주도한 을사오적을 척결하기 위해 조직 활동을 하다가 10년의 유배형을 선고받기도 했다.1909년 1월 15일, 나철은 『삼일신고』와 『신사기』 등의 책에서 영향을 받아 단군교를 창시한다. 단군교에는 독립 활동에 뜻을 가지고 있었던 식자층이 대거 참여하였고, 나철은 교주인 도사교로 추대되었다. 일제의 견제와 개입으로 친일 성향의 교도들이 생겨나자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그러나 일제는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대종교는 북간도 삼도구에 지사를 설립하며 교단의 중심축을 간도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한다. 1914년 마침내 백두산 북쪽 청파호 부근에 교단 본부를 마련하였다.대종교는 점차 교인과 세력을 늘려갔다.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포고규칙’을 만들어 대종교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을 가해왔다. 그리고 이듬해, 나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탄압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제자들에게는 계속해서 독립운동에 전념해달라는 유서를 남겼다.일제강점기 대종교는 종교단체이자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기실 나철이 대종교의 전신인 단군교를 창시한 것도 독립투쟁의 일환이었다. 나철의 죽음 이후 대종교는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는데 교인이 3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신규식·박은식·신채호·김좌진·이범석 등 당시 독립운동의 주축을 담당하던 인물들도 대종교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라’는 나철의 유언은 수십만 교인들을 향한 것이자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당부가 되었다.

 

alt

나철

alt

중국 지린성 화룡현 용성향(현 부흥진) 삼종사(서일, 나철, 김교현) 묘역

 

수류탄을 든 백발의 우국지사, 강우규

1919년 9월 2일,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부임을 위해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했다. 그가 막 마차에 오르는 순간 수류탄 한 발이 마차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어 수류탄 파편에 수십 명이 목숨을 잃거나 상해를 입었다. 불행하게도 암살 대상이었던 사이토는 무사했다.
사건을 일으킨 인물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의 지린성지부장, 강우규였다. 1855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난 그는 사이토 암살을 시도했을 당시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백발의 노인이었다. 강우규의 원래 직업은 한의사였으며, 때때로 동네 아이들을 모아 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을사늑약 이후 북간도로 망명하여 남은 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5년 강우규는 라오허강 주변의 농토를 개척하여 한인촌을 건설했다. 1917년에는 지린성 동화현에 광동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자로 활동했다. 3·1운동 이후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자 강우규는 새로 부임하는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한반도로 잠입하여 사이토 총독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행렬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총독은 죽지 않았다. 대신 정무총감이 부상을 입고, 총독의 수행원과 경찰이 죽거나 다쳤다. 사건 현장을 빠져나온 강우규는 동지 오태영의 소개로 장익규·임승화 등의 집에 숨어 지낸다. 하지만 총독부의 고등계 형사이자 일제 앞잡이였던 김태석에게 꼬리를 밟혀 거사 15일 만에 수감되었다. 총독부 고등법원에서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재판 중에도 강우규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당당했다. 자신의 행위는 나라를 빼앗은 도둑들에 대한 응징으로서 정당했으며, 그 어떤 잘못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형을 당하기 직전 그는 시 한 편을 남겼다.

 

단두대상에 홀로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이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alt

강우규

alt

강우규 의거 L.A Times 삽화

 

뜨겁게 타올랐던 조국광복의 염원, 이상설

이상설은 고종의 헤이그 특사 3인 중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71년에 태어나 1894년 전시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왔다. 이후 성균관 교수와 탁지부 재무관을 거치면서 신학문을 접하고 일본의 조선 병탄을 저지하는 일에 앞장섰다.1904년에 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이상설은 국권침탈이라며 이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대한협동회의 회장직을 맡게 된 뒤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반일운동에 나섰다. 1905년 법부협판과 의정부참찬 벼슬에 오른 이상설은 을사늑약을 반대하면서 을사오적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노력이 무색하게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이상설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6년 영의정에 임명되어 한 달 남짓 정치에 가담하고는 물러났다.이상설은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머무르다 간도 용정촌으로 갔다. 그곳에서 서전서숙을 설립, 항일민족운동과 교육에 전념했다. 이내 서전서숙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문을 닫아야만 했다.이 무렵 고종은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정사로 임명된 이상설은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로 갔으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상설은 일본의 한국 침탈을 규탄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그 특사의 회의 참석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후 이상설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 한인 교포들의 단합을 촉구했다.1909년, 이상설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러시아와 중국 동북지역의 점이지대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한흥동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며 연해주의 한인들을 결속시켰다. 나아가 일제에 대한 무력 저항을 위해 연해주 주변의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했다. 이 내용을 고종에게 올리며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이상설은 연해주 외곽의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는데, 일제가 러시아 정부에 이상설을 체포하도록 압력을 넣은 결과였다.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이상설은 권업회를 조직, 「권업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한인학교를 확대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최초의 망명정부라 할 수 있는 대한 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정통령에 피선되었다. 하지만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 때문에 광복군정부의 활동엔 많은 제약이 따랐다. 결국 권업회는 러시아 정부에 의해 해산되고 광복군정부도 해체되었다. 이후 상하이로 가 신한혁명당을 조직하는 데 일조하며 본부장에 선임되었지만, 이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건강이 나빠져 병석에 눕게 된 것이다. 1917년, 이상설은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alt

이상설

alt
서전서숙(1908.09.)
alt

헤이그특사가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낸 공고사(1907.06.27.)

 

 


박영규

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