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그날

치열한 전투 끝에 남은
미완의 희망

INPUT SUBJECT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치열한 전투 끝에 남은

미완의 희망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이번 회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독립전쟁 이야기다. 중국 동북지역·러시아 연해주에서 피어오른 항일무장투쟁의 열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마침내 오른 독립전쟁의 서막, 봉오동전투

독립군을 쫓아 두만강을 건넌 일본군은 어느새 지린성 봉오동에 접어들었다. 일본군은 함경도에 주둔한 19사단 소속 월강추격대였다. 독립군은 산중에 매복하여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 계곡의 아침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일제 강점 10년. 바야흐로 독립전쟁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면서도 일본군이 국경을 넘어 추격에 나선 것은 그만큼 독립군을 눈엣가시로 여겼기 때문이다. 1919년 조선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떨친 3·1운동의 여파로 중국 동북지역 일대에서는 한인(韓人) 독립군 부대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듬해가 되자 독립군은 수시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균열을 일으켰고, 일본군은 이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독립군을 소멸하고자 추적 작전을 감행했다.300여 명의 월강추격대는 훈련이 잘 돼 있고 최신무기를 갖춘 정규군대였다. 그들이 볼 때 독립군은 형편없는 오합지졸이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험준한 산림지대를 거침없이 진군했다. 독립군은 사전에 일본군의 동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골짜기마다 병력을 숨겨 놓았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을 필두로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안무의 대한국민군·이흥수의 대한신민단 등이 연합부대를 꾸려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봉오동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면 지형의 이점이 큰 천연요새였다. 일본군이 아무것도 모르고 매복지대로 들어서자 독립군의 총기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우거진 산림에서 쏟아지는 탄환에 추격대원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반격을 가하고 싶어도 총탄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결국, 일본군은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 당했고, 나머지도 대부분 부상을 입었다. 반면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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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 기록화(출처: 문화콘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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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과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을 지휘하여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

 

전쟁이 희망이 되다,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는 독립군 연합부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항일무장투쟁의 기세를 북돋웠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중국 동북지역 일대 독립군을 뿌리 뽑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른바 ‘간도 불령선인 초토 계획’을 세웠다. 간도는 두만강과 압록강의 건너편으로 조선과 인접한 지역인데, 19세기 후반부터 이곳에 한국인들이 대거 이주해 살고 있었다.
음모는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1920년 10월 2일 일본 측에 매수된 중국 마적단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일본인 13명을 처단했다. 이 자작극을 빌미로 일제는 직접 마적을 토벌하겠다며 2만 대군을 편성해 중국 영토인 간도를 무단으로 침범했다. 일본군 병력이 북간도와 서간도를 포위하자 독립군은 민간인 피해를 우려해 백두산 부근 산악지대로 이동했다. 약 2천 명의 독립군이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에 집결한 가운데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가 산기슭 마을인 청산리에 진을 쳤다. 북로군정서는 그해 자체적으로 사관을 양성하고 연해주에서 무기를 들여오며 정예부대로 거듭나는 중이었다.
독립군 소재를 파악한 일본군은 아즈마 지대를 앞세워 쳐들어왔다. 1920년 10월 21일, 일본군이 청산리 계곡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좌진은 계곡에서 가장 폭이 좁고 절벽이 가파른 백운평 골짜기를 싸움터로 정하고, 북로군정서 병력을 둘로 나눠 각각 절벽 위와 산기슭에 매복시켰다.
오전 9시쯤 일본군이 골짜기 중앙에 이르자 김좌진 부대의 소총과 기관총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적의 선봉대는 전멸을 면치 못했고, 뒤따라온 본대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대포 등 중화기를 앞세워 반격에 나섰다. 보병과 기병이 측면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지형의 이점을 틀어쥔 독립군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전세가 기울어지자 일본군은 전사자 300여 명을 남긴 채 일단 물러났다.
전투는 26일까지 계속되었다. 북로군정서는 백운평에 이어 천수평·어랑촌·맹개골·만기구·쉬구·천보산 등지에서 연전연승을 거뒀다.
전력이 밀리다 보니 위기의 순간도 찾아왔다. 어랑촌에서는 적의 주력부대가 퍼붓는 공격에 중과부적으로 고전했다. 김좌진 부대가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조준 사격을 했지만, 일본군은 악착같이 밀고 올라왔다. 처절한 혈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가뭄의 단비처럼 구원군이 나타났다.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완루구에서 적군을 물리치고 어랑촌으로 달려온 것이다. 앞뒤로 독립군을 맞게 된 일본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주춤하는 사이에 독립군은 포위를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 부대는 서로 힘을 모아 일본군에 대승을 거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의 인명 손실은 전사자 1천200여 명, 부상자 2천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언론인이자 역사가였던 박은식은 청산리 대첩의 전과를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 한국인들은 물론 중국인과 유럽인들도 환호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세계적으로 미증유의 기묘한 신공이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제와의 전쟁이 필연적이라고 독립지사들이 부르짖었지만, 의구심도 있었다. 무력으로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을까? 하지만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승리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항일무장투쟁은 어느새 독립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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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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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무장투쟁의 지도자 김좌진 장군

항일무장투쟁에 사무친 민간인 대학살, 경신참변

그러나 항일무장투쟁의 이면에는 민간인의 희생이 있었다. 청산리대첩의 빛나는 전공도 일제가 저지른 보복과 학살에 퇴색됐다. 1920년 10월 간도를 침범한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과 병행하여 한인사회를 초토화했다. 간도 전역의 한인촌락들을 습격하여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가옥·학교·교회들을 불태웠다. 이를 ‘경신참변’이라 부른다.
경신참변의 실상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잔혹했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도운 벌이라며 한인 주민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사격연습을 하듯 총을 쏘아댔다. 당시 간도에서 활동했던 캐나다인 선교사 마틴은 그 광경을 글로 남긴 바 있다.

 

“무릇 남자는 노인과 어린애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섶에 불을 붙여 그 몸 위로 던졌다. 죽어가는 사람이 아픔을 못 견뎌 펄펄 뛰며 비명을 질렀다. 이처럼 잔인하게 살해하면서도 사망자의 부모처자로 하여금 지켜보게 했다.”

 

또 용정촌 동북쪽의 한인 기독교 마을인 장암동에서는 40대 이상 남자 33명을 묶어서 교회당 안에 밀어 넣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이 참혹한 광기는 1921년 4월까지 기승을 부렸다. 경신참변 당시 피해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다만 일제의 만행이 극심했던 1920년 10~11월에 훈춘·왕청·화룡·연길·유하·흥경·관전·영안 등 8개 현에서 발생한 한인 피해는 기록이 전해진다. 피살 인원 3천600여 명· 체포 인원 170여 명·부녀자 강간 70여 건·소실된 가옥 3천200여 채·소실된 학교 41채·소실된 교회 16채였다.
일제가 이런 만행을 저지른 까닭은 한인사회가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05년 즈음부터 중국 동북지역로 간 독립지사들은 한인촌락·자치조직·학교 등을 만들면서 십시일반 돈을 모으고 인재를 길러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2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항일무장투쟁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일제는 바로 그 기반을 무너뜨리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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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참변 당시 살해 위기에 몰린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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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참변으로 학살된 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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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이 남긴 미완의 숙원

중국 동북지역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들어갔다. 독립군은 러시아에 의해 건국된 극동공화국의 원조를 받아 전열을 정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1921년 봄, 자유시에서 한인 무장단체는 러시아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내분에 휘말렸다. 이때 독립군은 극동공화국군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 사건이 바로 자유시참변이다.독립군 중 일부는 중국 동북지역 본거지로 돌아왔지만 세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다시 근거지를 구축하기 시작하여 통의부를 비롯해 독립군을 재건했다. 항일무장투쟁이 다시 도약한 것은 1920년대 후반 민족유일당 운동이 펼쳐지면서부터였다. 지역과 이념을 뛰어넘어 독립운동을 통합하자는 움직임 속에서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이 창설되어 활약을 펼쳤다.1930년대 이곳 항일무장투쟁은 ‘한중연합’이라는 특색을 띤다. 1931년 9월 일제가 본격적인 대륙침략 전쟁을 일으키고 괴뢰 만주국을 세우자 중국군은 한인 독립군과 손잡고 대항하였다. 양세봉이 지휘하는 조선혁명군이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격파한 영릉가전투(1932), 이청천의 한국독립군이 일본군 75연대와 수송부대를 무찌른 대전자령대첩(1933) 모두 한중 연합작전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벽은 너무 높았다.중국 동북지역의 한인 독립운동 부대들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점차 동북항일연군에 흡수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이 주도한 군사조직으로서 한인 독립군이 대거 합류했다. 그중 한 사람이 20대의 김일성이다. 당시 그는 정치위원과 부대장을 맡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자 1940년 러시아 연해주로 향했고, 그곳에서 88특별여단으로 편성되어 광복을 맞았다.중국 관내에서는 1938년, 의열단의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 기간 중 중국군과 함께 항일전선을 구축하였고, 특히 일본군 포로 심문과 반일 선전활동에 나섰다. 1940년대 들어서 김원봉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자 조선의용대는 둘로 나뉘었다. 그중 일부는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의 주력부대로 활동했다.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꿈에 그리던 광복이 찾아왔다. 일제 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을 계승한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은 독립국가의 기반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조국을 향한 그들의 행군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열강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 막이 오른 독립전쟁은 분단의 그늘 속에서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겨졌다. 그 얽히고설킨 역사의 실타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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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한인 사회주의 전사들이 활약한 동북항일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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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의 주도로 1938년 중국 한커우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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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OSS에서 훈련받으며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한 광복군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