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숨은 역사
물길 따라 역사가 흐르는 곳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물길 따라 역사가 흐르는 곳
-충청북도 충주-
호수에 둘러싸인 도시, 충주. 충주는 예부터 ‘중원(中原)’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국토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 삼국시대에 이곳이 군사적 거점이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제에서 고구려가, 그리고 다시 신라가 충주를 차지했다. 특히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은 뒤 ‘중원소경’을 세우고 대가야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충주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아이의 마음으로 독립을 노래하다
먼저 탄금대로 간다.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 시절,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중 하나로 알려진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했던 곳이다. ‘탄금대’라는 이름도 그렇게 생겨났다. 우륵은 남한강이 바로 보이는 이곳 바위에 걸터앉아 가야금을 탔다. 그 아름다운 소리에 이끌린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시대 탄금대는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다. 당시 신립 장군은 남한강 언덕에 위치한 절벽을 12번이나 오르내리며, 병사들에게 힘을 불어넣고 뜨거워진 활시위를 강물에 식혔다고 한다. 그래서 절벽의 이름은 ‘열두대’다.탄금대 아랫마을, 칠금동에 독립운동가 권태응 선생의 생가가 있다. 권태응 선생은 동요집 『감자꽃』과 동시 ‘도토리들’·‘산샘물’·‘달팽이’·‘고추밭’·‘옹달샘’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며 우리나라 아동문학사를 이끌었다. 올해는 권태응 선생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로, 이를 기념하여 충주에서는 동요제를 열기도 했다. 탄금대 들머리와 생가터에 선생의 대표작인 ‘감자꽃’ 노래비가 서 있다. 오래된 노랫말엔 순수한 동심과 함께 독립에 대한 염원이 서려 있다.권태응 선생은 어린 시절, 한학자인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충주 공립보통학교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과에 입학했지만, 동창 염홍섭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퇴학을 당해야만 했다. 이후 재일 유학생들을 규합해 독서회를 조직,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투신하다가 다시 붙잡혔다. 옥고를 치르던 그는 폐결핵을 얻어 이듬해 풀려났다. 1939년의 일이었다. 선생은 아픈 몸을 이끌고 충주로 내려와 농사를 지었는데, 이때부터 동요 창작에 매진하며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내 나라는 독립을 맞았지만, 그 감격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다시 병세가 나빠진 것이다. 결국 1951년 3월 28일, 권태응 선생은 3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우륵이 가야금을 탔던 탄금대 전망대

독립운동사에서 충주를 알린 사람들
권태응 선생 외에도 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있다. 우근 류자명과 그의 외사촌 자형으로 충주농고 설립에 앞장섰던 정운익·개성 3·1운동의 주역 권애라·어윤희 선생이 대표적이다.1919년 3·1운동 당시 충주 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있던 류자명 선생은 학생들과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비록 만세시위에는 실패했지만 선생은 좌절하지 않고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조선혁명자연맹·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흐트러진 민족의식을 다잡았다. 중국에서 광복을 맞이한 그는 조국으로의 귀국을 서둘렀지만 곧바로 발발한 한국전쟁 때문에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소태면 출신의 어윤희 선생은 개성 3·1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와 남편을 잃은 뒤 고향을 떠난 기독교에 입문했다. 1919년 3월 1일 개성 시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들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넘게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도 유관순 선생과 함께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벌이면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충주지역의 3·1운동은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 독립운동으로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실천운동이었다. 충주 시내 충인동 옛 장터(누리장터)에서 관아공원까지 이르는 길은 3·1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당시 충청북도 도 장관이 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 강당에 충주 시민들을 모아 놓고 겁박하며 만세운동 저지 연설을 했던 일은 유명하다. 관아공원, 그 역사적 현장에는 지금도 일제강점기 식민수탈기관 역할을 했던 옛 조선식산은행이 남아 있다. 그리고 대소원면 대소리에는 충주 지역 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독립유공자 추모비가 있다.



대소원면 대소리에 세워놓은 충주 지역 독립유공자 추모비
신라의 중심, 그곳에 세워진 미려한 석탑
탄금대교를 건너 올라가다 보면 중앙탑 사적공원이 있다. 공원에는 신라의 석탑 중 가장 길이가 길다는 탑평리칠층석탑이 있다. 일명 ‘중앙탑’이라고도 불리는 이 탑은 충주가 국토의 중앙에 있음을 증명하는 유산이다. 전설에 의하면 같은 보폭을 가진 두 사람을 남과 북에서 동시에 출발시켜 두 사람이 만난 곳에 탑을 세워둔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탑이 세워진 자리야말로 신라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다.
중앙탑이 있는 곳은 드넓은 공원이다. 잔디밭 사이로 각종 조각품들이 전시돼 있고 옆으로는 조정대회가 한창인 탄금호가 펼쳐진다. 중앙탑에서 5분 거리에 ‘중원고구려비’가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5세기 무렵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을 개척하면서 세운 것이라 한다. 사각기둥 형태인 비의 네 면 중 세 면에서 글씨를 발견할 수 있는데, 마모가 심해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200여 자에 불과하다. 고구려비임이 알려지기 전, 마을 아낙네들이 빨래판으로 썼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건립 연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비문에 보이는 ‘십이월삼일갑인(十二月三日甲寅)’이란 간지와 날짜를 고려했을 때 449년(장수왕 37년)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중원고구려비는 보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옆에 새로 들어선 전시관 안으로 옮겨졌다.
중원고구려비를 본 뒤 목계교를 건넌다. 다리 밑으로 남한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목계교 앞은 먼 옛날 목계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목계에서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이르는 강을 따라 수많은 뗏목과 물산이 오갔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충주 출신의 신경림 시인은 목계나루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까닭일까? 현재 목계나루 주변에 옛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국토의 중앙을 알리는
탑평리칠층석탑

미륵사지에 남아있는 석불입상

조정대회가 열리는 탄금호는 충주 시민들의 휴식처다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충주호
마의태자가 월악산에 절을 지은 이유
충주호는 충주 여행의 핵심이다. 충주호 인근에 있는 여러 개의 나루(충주나루·월악나루·청풍나루·장회나루)에서 유람선을 타면 된다. 38km의 긴 물길을 미끄러지듯 달려나가는 대형 유람선 안에서 호수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제법 벅찬 기분이 든다.충주호에서 수산면을 거쳐 36번 국도를 타고 충주 방향으로 가면 월악산국립공원이 있다. 웅장한 월악산을 사이에 두고 가르마처럼 펼쳐진 두 계곡이 있으니, ‘용하구곡’과 ‘송계계곡’이 바로 그것이다. 돌돌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이 탁해진 마음마저 씻어낸다. 송계계곡 안에 있는 자연대·월광폭포·학소대·망폭대·수경대 등은 설악산 한 귀퉁이를 옮겨놓은 듯 유려하고 아름답다. 월악교에서 송계로 빠지는 597번 지방도는 월악산국립공원을 지나 수안보온천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송계계곡 위쪽에는 신라 마의태자의 전설이 내려오는 미륵사지가 있다. 마의태자는 고려의 왕건에게 자리를 빼앗긴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 살았는데, 경주를 떠나 금강산으로 가던 중 한동안 월악산에 머물면서 미륵사를 세웠다고 한다. 현재 절의 모습은 간데없고, 5층 석탑과 석불입상을 비롯해 석등·3층 석탑·커다란 돌 거북만이 있을 뿐이다. 절터 뒤쪽으로 문경과 이어지는 하늘재 고개가 있다.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는 하나 높지는 않다. 새소리·바람소리·물소리를 음악 삼아 느리게 길을 따라 오르니 힘겨운 세상살이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지난날, 나라를 잃고 고개를 넘었던 마의태자 또한 이곳의 호젓함에 이끌려 미륵사를 세웠으리라. 좁은 길가 사이로 폐위된 태자의 설움이 소복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