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찾은 오늘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INPUT SUBJECT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한 편의 ‘드라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격동기 한가운데 민족을 위해 온몸을 내던졌으니 극적일 수밖에. 그리고 그들의 드라마는 대부분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김준엽 총장은 다르다. 그는 비극으로 시작한 인생을 희극으로 끝낸, 독립운동가로서는 보기 드문 해피엔딩의 주인공이었다.


 

청년 독립군 학자가 되다

▲독립운동가·교육자 김준엽 ▲1920년 평안북도 강계 출생 ▲1944년 일본 게이오 대학 동양사학과 2학년 재학 중 강제징집 ▲일본군이 중국 내지에 주둔하자 단독 탈영. 장준하 합류 후 충칭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동 ▲광복군 소속 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활약 ▲장준하 등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정의 특공부대로 차출. 훈련 중 광복 ▲1949년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 ▲1982년 고려대학교 총장 취임 ▲1985년 총장 사임 ▲2011년 6월 7일 타계(他界)

 

김준엽은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이 총력전을 펼치던 당시 학도병으로 차출되었다가 목숨을 건 탈영에 성공한다. 곧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서 광복군에 합류, 독립의 꿈을 키웠으나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패망하는 바람에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였다. 미처 풀어내지 못한 ‘뜻’은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금 기회를 맞이한다. 역사학자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광복 이후 후학양성에 힘쓰던 김준엽은 1982년 고려대학교 총장에 부임한다. 총장 부임 당시의 일화는 그의 소탈한 면모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총장 취임식 당일, 김준엽은 서무과 직원에게 행사장 위치를 물었고, 직원은 “오늘은 우리가 총장 취임식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 대꾸했다. 이에 김준엽은 자신이 그 총장이라고 대답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또 학생운동이 치열했던 시기, 그는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학생과 그들의 신념을 지켰다. 학생운동을 주도한 학생을 제적하란 정부의 압력을 정면에서 거부했고, 학교 안에서 시위가 벌어질 때는 “학생 제군들 다치지 마라!”며 학생회관 앞에 구급차를 대기시켜 놓기도 했다. 다친 학생들을 병원으로 후송시킨 뒤 다음날까지 그 곁을 지킨 일도 있었다. 정부는 이런 김준엽에게 12번이나 공직을 제안했다. 장관은 물론 총리직 제안도 있었으나 김준엽은 이를 거절했다. 학자로서 양심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입각을 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김준엽이 권력의 압박에 의해 총장직을 사퇴했을 때, 고려대 학생들은 총장 사임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것은 김준엽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김준엽은 권력의 유혹과 압력을 이겨내며,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일까? 그는 말한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역사의 신을 믿어라. 긴 역사를 볼 때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범인(凡人)들은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조차 힘겹다.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릇된 현실과 타협하는 비겁한 태도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세상은 둥글둥글하게 살아야 한다’는 마법의 논리.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몇 번이고 맞닥뜨리게 되는 유혹이다. 하지만 김준엽은 당장 내가 처해 있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내다봤다. 오늘, 혹은 이 순간은 내일이면 흔적 없이 사라질 어제가 아니라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될 터. 김준엽은 역사에 기록될 오늘 하루와 그 하루를 올바르게 만들기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을 고민했다. 그것이야 말로 시대의 스승 김준엽을 만든 원동력이었다. 기나긴 역사 앞에서 정의와 진실은 언제나 승리했다. 김준엽은 역사를 믿었고, 그 믿음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과 권력에도 아랑곳 않고 딸깍발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논어(論語)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천명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삶의 목표이자 이상, 또는 기준이라 할 만한 것이다. 김준엽에게 삶의 기준은 ‘역사’였다. 당장 오늘 하루를 편하게 보내기 위해 세상과 타협한다면 그 같은 안이한 타협이 모여서 얼룩진 역사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근시안적인 삶이 아니라 멀리 내다본다면, 정의와 진리가 언젠가 승리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마침내 삶은 빛날 것이다. 범인(凡人)에게는 가혹한 요구일 수도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역사를 믿고 온몸을 던져 싸웠던 독립투사들도 시작은 평범했다. 그 삶을 믿어보자.

 


이성주

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