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그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담배를 끊고 가락지를 빼다

INPUT SUBJECT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담배를 끊고 가락지를 빼다

 

국채보상운동
1907.02 ~ 1908.07




매월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두 번째 이야기는 1907년 2월 거국적으로 번진 국채보상운동이다.

일제의 경제 침략에 맞서 온 국민이 단합해 뜻을 모은 모금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매월 온 국민이 참여한 기적의 모금운동

‘우리 정부가 급히 발전하고자 (일본에서) 들여온 빚이 거금 1,300만 원이라. 이집트는 영국과 프랑스의 돈을 빌렸다가 일 처리가 좋지 못해 결국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국민 된 사람으로서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로다. 우리 2천만 동포들이 1원씩 낸다면 2,000만 원이요, 50전씩 낸다면 1,000만 원이니 백성들이 나랏빚을 갚는 일이 어찌 불가능하리오.’

 

1907년 2월 22일 국민 스스로 나랏빚을 갚자는 ‘국채보상기성회의 창립취지문’이 발표되었다. 이 호소는 <대한매일신문>·<황성신문> 등이 발 빠르게 보도하며 전국 방방곡곡 퍼져나갔다. 대구에서 물꼬를 튼 국채보상운동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온 나라를 뒤덮는 순간이었다. 남녀노소·빈부귀천 따지지 않고 국민 모두가 이 거국적인 모금운동에 동참했다. 남자들은 궐련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나랏빚을 갚는 데 나섰고 여자들도 비녀와 가락지를 빼고 쌀 한 줌씩 아껴 성금을 모았다. 아이들 또한 제 부모를 따라 코 묻은 세뱃돈이나 용돈을 내놓았다.

 

‘2월 24일 서울 상사동 이씨 부인이 패물을 팔아 새 돈 2환을 보태다. 3월 1일 김석자 등이 매일 아침밥과 저녁밥을 반 그릇으로 줄여 석 달분 값 2원 70전을 보내다.’
<대한매일신보> 의연금 현황 기사

 

나라를 지키는 모금운동에는 신분의 구별도 없었다. 서울 북촌과 생선 시장의 인력거꾼들은 고된 노동의 대가를 아낌없이 납부했다. 기생조합에서도 비록 천한 일을 하나 나라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며 동참했다. 머슴·가마꾼·백정 등 하층민들도 십시일반 품삯을 모아 성금 접수처로 달려갔다. 짚신 삼는 노인은 두부 비지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무려 2원을 냈다. 쌀 한 말 값이 1원 80전 하던 시절이었으니 가난한 이에게는 거금이 아닐 수 없었다. 또 다리 밑의 거지는 몸을 다쳐 구걸하는 처지임에도 주머니의 돈을 모두 내놓았다. 홀로 두 자식을 키우는 과부 역시 편지와 함께 쌈짓돈을 보냈다.
하층민과 빈자들까지 나서는 판에 부유한 상류층이 가만있을 수 있었을까. 광무황제는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에 공감해 즐겨 피우던 담배를 끊고 세자의 혼례까지 연기했다. 궁궐 안의 관리들도 황제의 뜻에 따라 모금운동에 참여했다. 장안의 갑부들도 두터운 지갑을 열었고 일본 유학생들은 금연동맹을 맺어 의연금에 보탰다.
당시 독자가 가장 많았던 <대한매일신보>에는 이 거국적인 모금에 관한 미담이 차고 넘쳤다. 충주 사람들은 의연금을 갖고 서울로 가다가 어느 고갯길에서 도적 떼를 만났다. 도적 두목이 칼을 휘두르며 위협했지만 그들은 돈을 내놓기는커녕 국채보상의 취지를 설득했다. 부끄러움을 느낀 두목은 오히려 제 호주머니를 털어 성금을 맡기고 물러갔다. 이 밖에도 소 판 돈 10원을 기꺼이 쾌척한 농민·집을 팔아 셋집으로 옮기면서 그 차액을 낸 일가족의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황성신문>의 사설은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를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응하는 자 구름 같아서 시정의 상인들은 머리와 힘으로 번 돈을 바치고 노동자 일꾼들은 다릿심으로 번 돈을 바쳐 오히려 남보다 뒤질세라 두려워한다니 실로 우리 국민이 이처럼 즐겨 응할 줄 요량조차 못하였으며 실로 우리 국민에게 이처럼 굳센 힘이 있는 줄 뜻하지 않았음이로다.’

 

이렇게 1907년 5월까지 4만여 명이 모금에 참여했고 의연금도 230만 원 이상 쌓였다. 국채보상운동에 온 국민의 간절한 뜻이 모이면서 하나의 거대한 힘이 형성되고 있었다. 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하고자 한 진정한 의미의 국민운동이었다. 그렇다면 그 첫걸음은 어떻게 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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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기성회 창립취지문 (1907년 <대한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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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연금 영수증

 

일본에 맞서 민족자강의 길로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하자 일본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사실상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나아가 국권을 완전히 강탈하기 위해 일제는 집요하고 치밀하게 움직였다. 그 가운데 핵심이 경제 주권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들은 빚쟁이가 되어 주인을 집에서 내쫓는 책략을 썼다. 나랏빚이 늘어난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 통감부에서는 대한제국의 산업기반을 조성한다며 건물을 짓고 도로를 닦고 항구를 넓히는 데 나섰다. 사실 그것은 일제 통치기구가 들어설 건물이고, 일본산 제품을 전국 방방곡곡 나르는 도로이며, 우리나라의 곡식과 광물을 싣고 나갈 항구였다. 그들은 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이 사업들을 추진했고 국채는 대한제국 정부에 떠넘겼다. 1907년 기준 대한제국이 일제에 진 빚은 1,300만 원에 달했다. 당시 정부의 연간 재정수입이 1,319만 원, 지출이 1,395만 원이었으니 국채가 한 해 예산과 맞먹었다. 대한제국은 이 어마어마한 빚을 갚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었다. 빚쟁이 일본은 어업권·삼림벌채권·석탄채굴권 등 노른자위 특권을 빼앗으며 차압의 강도를 높여나갔다. 대구에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던 상인 서상돈과 전직 관리 김광제는 이런 상황을 우려했다. 그들은 이곳에 광문사를 세우고 교육출판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빚 때문에 나라를 빼앗기는 국가적 위기를 간파했다. 1907년 2월 서상돈과 김광제는 공동명의로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돌리고 모금운동을 호소했다.

 

“우리가 감히 이 일을 시작하면서 피눈물로 호소하노니, 대한의 모든 국민들이 말로 혹은 글로 서로 전하고 알려 모르는 이가 한 사람도 없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필코 우리 힘으로 우리 강토를 보존할 수 있도록 뜻을 모읍시다.”

 

국채보상운동의 실천방안으로 맨 먼저 한 일은 단연회(斷煙會), 곧 담배 끊는 모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담배를 세달만 끊고 아낀 돈으로 나랏빚을 갚자는 이야기였다. 국채보상 한다면서 왜 담배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을까? 담배가 건강에 해롭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문제는 담배의 경제학이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서양식으로 종이에 말아 피는 궐련 담배가 유행했다. 이 새로운 담배의 판매권은 일본 상인들이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부산과 대구에 담배공장을 차리고 일본에서 들여온 원료로 궐련을 생산해 팔았으며, 이로 인해 거금이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다. 대구의 거상 서상돈이 담배 끊기를 국채보상운동과 연계한 이유다.
국채보상운동은 결국 경제 주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제힘으로 빚을 갚고 잘살아보자는 민족자강정신이 깔려있었다. 그 취지에 온 국민이 공감하여 한뜻으로 모금운동을 펼치자 일제는 당황했다. 이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국권을 빼앗을 수 있는데 뜻밖의 암초를 만난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현재 조선이 안고 있는 국채 1,300만 원을 갚는 데 있다고 하나, 실제 내용은 우리 일본에서 벗어나 독립하려는 배일운동(排日運動)입니다.’

 

당시 통감부 경찰책임자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올린 보고 내용이다. 전직 총리대신이자 을사늑약의 주모자로 대한제국을 삼키려는 그에게 국채보상운동은 분명 걸림돌이었다. 무엇보다 위험한 점은 한국인들을 단합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통감부는 이 운동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구심점을 제거하기 위해 간교한 방해 공작을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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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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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에 위치한 김광제 동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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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과 김광제의 국채보상운동 취지서(1907년 <대한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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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연상채광고가(담배를 끊어 나랏빚을 갚자는 노래)

 

국난을 극복하는 단합의 힘

일제는 1907년부터 일진회 등을 동원해 국채보상운동을 흔들었다. 국민이 나라의 빚을 갚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 모금운동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또 국채보상운동을 대서특필하고 의연금 모금에 앞장선 <대한매일신보>를 저격했다. 신문사 사장 베델과 총무 양기탁에게 아무 증거도 없이 국채보상금 횡령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영국인 베델은 추방 위기에 몰렸고 양기탁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뒤에 무죄가 밝혀지긴 했지만 타격은 컸다. 1908년 이후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는 식어버렸다. 악의적인 소문들이 나돌면서 성금 내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대한매일신보>도 1909년 베델의 죽음과 함께 항일투쟁 논조를 잃었다. 대한 사람들의 피땀 어린 의연금은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국채보상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결코 실패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큼직한 발자국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범국민적인 구국운동이었으며 일본의 경제 침략에 맞서 온 국민의 단합을 이루어냈다. 남녀노소·빈부귀천 따지지 않고 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하고자 했다. 신분제 사회에서 국민국가로 나아가는 때에 뜻깊은 역사적 경험을 한 것이다. 이 경험은 3.1운동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 항일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가깝게는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으로 국민을 이끈 나침반이기도 했다.또 근대적 여성운동의 시초였다. 의연금을 모으는 평화적인 저항 방식은 여성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넓혔다. 남자들이 담배와 술을 끊어 돈을 모았다면 여자들은 밥을 줄이고 반찬값을 아꼈다. 이 밖에도 가락지나 비녀를 빼서 의연금에 보탰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국민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국민으로서 차별받지 않는 권리를 찾으려 한 것이다. 2017년 10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2,472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국채보상운동 취지문·수기·영수증·장부·언론 보도 등이다. 나라를 빼앗으려는 일제의 차관 공세에 맞서 전 국민의 25%가 자발적으로 모금에 참여한 주인의식이 이제 세계의 자랑거리로 떠올랐다. 한국인에게는 힘을 합쳐 국난을 극복해온 역사가 있다. 국민의 뜻을 하나로 모으면 어떤 시련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바로 이런 점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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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 모습(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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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진골목에 위치한 국채보상운동 이야기가 담긴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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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에 등재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