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접시의 추억

INPUT 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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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떡국에 담긴
그 시절 그 이야기

 


설날 하면 으레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음식은 바로 떡국이다. 물론 지역에 따라 만두도 함께 먹지만,

만두가 고려 때 전해진 외래 음식이라는 점에서 떡국이야말로 전통적인 설 명절 음식일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설날 대표 음식으로 떡국을 챙겨 먹었을 것 같지만, 그렇게 만만한 음식도 아니었다.

귀해서 아무나 먹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고, 어렵사리 마련하고도 마음 놓고 먹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설날 떡국에 어떤 역사와 사연이 담겼을까?


설날의 유래와 떡국의 역사

설날에 떡국을 먹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언제부터 설날을 명절로 쇠었을까? 다소 애매하지만 음력 1월 1일이 설날이라면 2,100년 전부터로 유추해볼 수 있다. 지금 쓰는 음력인 태음태양력의 기초가 되는 태초력이 기원전 104년에 정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해가 설날이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기원전 10세기에는 주력(周歷)에 따라 동짓날이 새해 첫날이었고 기원전 3세기 진시황 때는 전욱력을 썼으니 10월 상달이 새해의 시작이었다. 한편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양력으로 따져보면 우리는 1896년, 일본은 1876년부터 새해가 달라졌다. 이때부터 서양 달력인 그레고리력을 채택했기 때문이다.예로부터 사람들은 해가 바뀐 것을 기념해 음식을 먹었다. 동지팥죽과 상달 고사떡이 모두 옛날 달력으로 새해 음식이다. 그런 면에서 떡국은 음력 설날에 먹어야 맞다. 유래가 이러니 떡국 역시 약 2,000년 전쯤부터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인 배경을 유추해보면, 조상이 왕이었다면 모를까 귀족이나 양반 정도로는 어림없었을 만큼 쌀은 그렇게 만만한 곡식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쌀이 전해진 것은 먼 옛날이지만 고려 때만 해도 진짜 부자나 귀족 아니면 쌀밥을 못 먹었다. 평민이 쌀밥을 먹게 된 것은 조선시대 중후반 이후부터다.그럼에도 최대 명절인 설날만큼은 어렵게 떡을 장만했다 해도 모두가 떡국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빨라야 조선 초쯤이다. 보통은 쌀이 아닌 다른 곡식으로 떡을 빚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에게 떡국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명절 아니면 쉽게 먹을 수 없었기에 설날에야 비로소 풍년을 기원하고 일 년 동안의 무사 평안과 건강을 빌며 떡국을 끓였다.

 

압박과 설움의 설날 떡국

쌀이 풍부해진 조선 후기 이후부터 떡국은 이제 백성들 누구나 먹는 명절 음식이 됐다. 그러나 현대로 접어들며 다시 한번 설날 떡국에 시련이 닥친다. 1927년의 신문기사에서는 아이들에게 설날 떡국을 한 그릇이라도 먹이려는 가난한 어머니의 아픔이 보인다.

 

‘설날은 다가오고 어린것에게 떡국 한 그릇 먹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이에게 떡국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고 싶어 전당포 문이 닫히기 전에 떡 사고 간장 사서 설 아침 준비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빨아 다듬은 옥양목 치마 한 벌을 전당포에 맡겼다. “이십 전이라도 주시오” 이 말을 들은 전당포 주인이 “치마를 얻다 쓰느냐”고 하면서도 놓고 가라며 삼십 전을 내주었다.’
 <동아일보> 1927년 2월 3일 자

 

가난한 사람이야 시대를 막론하고 있게 마련이지만 일제강점기에 설날 떡국조차 먹기 힘들었던 이유는 굳이 가난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날을 구정이라며 일제가 쇠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탄압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38년, 신문기사를 보면 설날을 명절로 지내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부역을 동원하고 동네 청소를 시켰다. 1940년 전북 임실에서는 아예 면사무소 직원을 총동원해 설날 떡을 만들지 못하도록 감시하기도 했다.
우리의 전통 명절을 없애기 위해 일제는 갖은 짓을 다 했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강점기 시절의 조선 백성은 설날 떡국 끓여 먹기가 만만치 않았다. 바로 한반도에서 엄청난 양의 쌀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경술국치의 해인 1910년의 통계에 따르면, 그해 쌀 총생산량 1,000만 석 중 5%에 해당하는 54만 석을 일본이 가져갔다. 그러다 중일전쟁 이후인 1939년에는 조선미곡 통제령을 발령하여 쌀 공출제도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1941년에는 쌀 생산량 2,152만 석 중 43%를 빼앗아갔고, 2차 대전 막바지인 1944년은 1,891만 석 중 63.8%를 수탈했다. 한반도에서 수확한 쌀 3분의 2를 가져간 것이다. 부족한 식량은 만주에서 조를 비롯한 잡곡을 들여와 채웠으니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설날 떡국은 우리의 역사에 있어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명절 음식이다.
 
한 살을 더 먹는다는 핑계로 기피해왔던 떡국. 새해 설날부터는 온 가족 모두 둘러앉아 떡국을 먹으며 그 이면에 숨겨져 있던 이야기들을 음미해보는 것은 어떨까.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 출장, 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 <신의 선물 밥>,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