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찾은 오늘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젊은이에게 노인이 되라고
할 수는 없잖나?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BR />젊은이에게 노인이 되라고 <BR />할 수는 없잖나?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젊은이에게 노인이 되라고
할 수는 없잖나?

 


이상재 하면 떠오르는 말들이 많다. 독설·언어유희·대쪽·촌철살인 등.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모든 걸 바친 민족의 지도자였지만,

비장함이나 결연함보다 여유와 유머가 넘쳐났던 이로 기억되고 있다.

만약 이 여유와 유머가 시답잖은 길거리 객담(客談)이었다면

그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오래도록 우리들 머릿속에 자리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여유와 웃음 뒤에는 민족에 대한 애정, 그리고 선비로서의 담대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청년 이상재

▲독립운동가 이상재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서천군 출생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  ▲1884년 우정국 주사(主事)에 발령 

▲갑신정변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낙향  ▲1887년 6월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워싱턴 D.C에서 근무  ▲1896년 2월 내각 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 1등 의관(議官)으로 임명  ▲만민공동회 주도  ▲1905년 을사늑약 직후 광무황제의 부탁을 받고 의정부참찬에 임명  ▲1913년 황성 YMCA 총무에 취임  ▲조선총독부에 맞서 YMCA 청년회를 지켜냄  ▲3·1운동 이후 만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이상재의 일생은 구한말의 격동기 속에서 민족의 생존을 위한 활로 모색과 투신의 시간이었다. 한학을 공부해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양반들의 매관매직 풍토로 낙방을 하게 됐고 그길로 과거의 뜻을 접었다. 그러나 인재는 주머니 속의 못 같은 것이라 이상재는 곧 세상에 나와 몸을 일으키게 된다.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경험한 그는 뒤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서기관으로 근무하였다. 아관파천으로 민족의 자존심이 무너졌을 때는 고종을 보필하며, 쓰러져 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갖은 애를 다 썼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당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상재는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항거했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건 그의 꼿꼿한 성품이다.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당당하게 기독교를 비판하고, 당대의 권력자들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소신 있는 발언을 주로 했다. 일례로 일본인들이 대포나 기관총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과연 대일본제국이 문명한 나라임을 알겠습니다. 다만, 성경에서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 했으니 그것이 걱정이올시다.”

 

꼰대와 아재 사이

이상재는 말년에 자신을 소개할 때 ‘청년’이란 말을 이름 앞에 꼭 붙였다. 그리곤 청년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했다. 주변에서는 이런 그의 행동을 만류하며, 젊은이들에게 너무 허물없이 다가가면 만만하게 보인다는 말을 했다. 이때 그가 남긴 대답이 과연 걸작이다.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젊은이들에게 노인이 되라고 할 수는 없잖나? 내가 청년이 되어야 청년이 더 청년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일세.”

오늘날의 한국은 초 갈등 사회다. 남녀 간의 갈등·지역 간의 갈등·계층 간의 갈등 그리고 요즘 들어 부쩍 심해진 세대 간의 갈등. 인터넷상에서는 아재 개그가 넘쳐나고, “내가 예전에 말이야...”로 시작되는 왕년의 이야기를 꺼내면 여지없이 ‘꼰대’로 몰린다. 나이 든 것도 서러운데, 이제 꼰대라고 무시까지 받는다. 이는 비단 젊다고 피해갈 문제가 아니다. 각 세대에게는 자신만의 시대를 관통하는 아픔이 있다. 우리 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픔은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가지고 있다. 당연히 ‘우리’는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의 간극이 곧 오해가 되고, 오해는 세대 간의 틈을 더더욱 벌려 놓는다. 빈곤의 악순환과 같은 고리를 끊을 방법이 뭘까? 그 해답에 바로 이상재가 있다.

 

이해받으려만 하지 말고,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해보는 건 어떨까? 칠순의 나이에도 청년들과 어울리는 걸 주저하지 않았던 이상재. 그는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 ‘청년’으로 살았다. 인터넷 농담 중에 ‘꼰대가 되느니 아재가 되겠다.’란 말이 있다. 꼰대가 돼 뒤에서 손가락질 받기보다는 차라리 아재가 돼 ‘썰렁하다’는 핀잔을 받는 게 낫다는 뜻이다. 아재 개그는 희화화의 대상이 아니라 청년에게 다가가는 아재들의 ‘노력’이 될 수도 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청년으로 살았던 이상재의 모습을 되새기며 우리 모두 ‘꼰대’가 되기보다 아재가 되도록 노력해 보자.


이성주

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