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INPUT SUBJECT

글 신현배 역사칼럼리스트
일제는 숭례문을
왜 허물려고 했을까?
조선 건국과 함께 세워진 숭례문은 오랜 세월 동안 수차례의 위협을 받아왔다.
특히 1908년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로 일본의 황태자 다이쇼를 초청했던 때에는 심지어 건물 전체가 허물어질 위기를 겪는다.
다행히 조선 사람들의 반발로 그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서쪽과 동쪽 성벽을 잃고 두 날개를 잃은 모양이 되고야 말았다.

숭례문(1900년)
한양의 얼굴, 숭례문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겼을 때 도성을 쌓고 동서남북 사방에 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을 두었다. 그 가운데서도 한양 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어 남대문이라고도 불리는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한양을 대표하는 얼굴이었다.숭례문은 1398년(태조 7년) 2월에 처음 세워졌다. 그런데 숭례문의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다는 의견이 많아 1447년(세종 29년) 8월에 고쳐 지었다. 지대를 돋우고 그 위에 돌을 쌓아 문루를 세운 것이다. 그 후 1479년(성종 10년)에 이르러 숭례문의 문루가 또다시 기울어져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추진되었다. 한양을 대표하는 얼굴치고는 태어나면서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던 셈이다.숭례문의 이름은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라고 하는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에서 비롯되었다. 그 가운데 ‘예’는 오행에서 남쪽을 뜻하기 때문에 사대문 중에 남대문은 이를 붙여 숭례문이라 한 것이다. 즉 숭례문은 예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으로 조선이동방예의지국임을 나타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연이 담긴 숭례문 현판
한편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 있다. 그것은 숭례문이 중국 사신을 맞아들이던 문이라서 귀한 손님을 서서 맞이함이 예의에 맞다 하여 세로로 써 놓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는 숭례문의 ‘예(禮)’자에 관련이 있다. 예 자는 오행으로 ‘화(火)’, 즉 불에 해당한다. 그리고 ‘숭례문’의 ‘숭(崇)’자는 예서(隸書)로 불꽃이 치솟는 모양이다. 따라서 현판 글씨를 세로로 써서 불이 타오르는형상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 남쪽 관악산의 불기운을 맞불로써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서울 도성에서 화재가 일어나는 것을 미리 막아 보자는 뜻이었다.숭례문 현판의 이름 석 자를 쓴 사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태종 때의 명필이었던 공조참판 신색이라거나 중종 때의 명필이었던 공조판서 유진동이라는 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글씨의 주인공을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이라 보고 있다. 『태종실록』에는 태종이 경복궁 안에 경회루를 짓고 그 현판 글씨를 양녕대군에게 쓰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양녕대군은 어려서부터 명필로 소문이 자자했다. 숭례문의 현판 글씨는 단숨에 휘두른 활달한 필적이 특징이다. 뒷날 명필로 이름을 떨친 추사 김정희가 과천에서 서울로 드나들 때 숭례문 앞에 서서 현판 글씨를 황홀하게 바라보았을 정도였다. 임진왜란 때는 이 숭례문 현판이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현판을 새로 써서 달았는데, 다는 족족 현판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던 광해군 때에는 서울 도성 안에서 이런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청파역 아래 배다리 밑에서 밤마다 괴상한 빛이 새어나온대.”“그게 정말이야? 도깨비불인가?”사람들은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어느 날 밤, 청파역 아래 배다리 밑으로 몰려갔다. 그러자 거기에 있는 웅덩이에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와 숭례문 쪽으로 뻗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웅덩이를 파 보았다. 그랬더니 거기에 임진왜란 때 사라졌던 숭례문 현판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현판을 꺼내 숭례문에 달았는데, 그 뒤로는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숭례문(현재)
사라질 위기를 겪어온 숭례문
1908년에는 숭례문이 헐릴 뻔하기도 했다.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로 일본의 황태자 다이쇼를 초청했는데, 그 전에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외부대신 이하영을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숭례문을 헐어야겠소. 대포로 쏘아서…”
“방금 뭐라고 하셨소?”
“숭례문을 헐어야겠다고 했소. 10월에 우리 일본 황태자 전하께서 조선을 방문하시는데, 어찌 숭례문 밑으로 걸어 들어가시게 할 수 있겠소?”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숭례문은 서울 도성의 정문이오.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소.”
이하영은 기가 막혀 하야시를 빤히 쳐다보았다. 일제는 숭례문을 헐겠다고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 사람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황태자는 숭례문의 서쪽 성벽을 헐고 큰길을 내서 마차를 타고 지나갔다. 다음 해에는 동쪽 성벽도 헐고 큰 길을 내어 숭례문은 두 날개를 잃은 새 모양이 되었다. 숭례문은 일제에 의해 여러 차례 모진 수모를 겪긴 했지만 임진왜란·병자호란 때도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2008년 2월 10일 어처구니없는 화재가 발생하여 숭례문이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5년 2개월 20일에 걸친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고, 2013년 5월 4일 준공 기념식을 가짐으로써 원형대로 복구하였다.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리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