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중국과 러시아를 누비며 무장투쟁을 지원하다

INPUT SUBJECT

 

글 학예실

 

중국과 러시아를 누비며

무장투쟁한 대한신민단 단장

 

김규면
金圭冕
1880.03.12. ~ 1969.02.02.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김규면을 2018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김규면은 무장투쟁 부대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이끌어간 지도자였으며,

일관되게 제국주의 타도와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반제국주의 전선의 혁명가였다.


alt

 

선교사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다

1880년 함북 경흥에서 태어난 김규면은 1900년 초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했으나 함경도 출신들을 차별하는 일제의 정책으로 무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생업을 위해 이주한 원산에서 캐나다 출신 선교사 펜윅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다. 1907년 가족들과 훈춘으로 망명한 김규면은 대한기독교회 소속 목사로 만주와 연해주를 오가며 선교활동을 펼쳐 나가는 한편 이동휘·김성무 등과 함께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양성에도 힘썼다. 1915년 대한기독교회가 일제의 종교탄압에 굴복하자 김규면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교인들을 모아 독립교회인 ‘대한성리교’를 만들었다. 이후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평양서원을 설립하여 독립자금 마련과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1918년 무렵에는 일본군이 시베리아를 침략하자 대한성리교 교인들을 중심으로 항일무장단체의 조직을 준비하였다. 그는 7개월 동안의 준비를 거쳐 1919년 3월 12일 조국의 완전독립과 민족의 대동단결을 목표로 대한신민단을 창설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김규면은 1922년 러시아 정부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무장부대를 해산시키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1924년 4월에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윤자영 등과 함께 상해청년동맹회을 조직하고 잡지 <한인청년>을 출판하였으며, 1924년 5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총장 대리로 임명되어 러시아 정부와의 자금지원 교섭 임무를 담당했다. 1925년에는 사회주의자동맹을 조직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김규면은 1927년 장제스가 사회주의자를 탄압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동양서적 판매원으로 일하며 연해주 지역의 빨치산 위원회를 지원하였다. 1933년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 비서의 체포 위협을 피해 모스크바로 이주한 김규면은 1969년 향년 8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김규면(1920년대)

alt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전경(1918년)

alt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찍은 사진(1920년)

 

alt

일본군과의 전투 내용이 기록된 자필 원고 『이만전쟁』(1922년)

 

 

 

alt

김규면을 교통총장 대리로 임명한다는 내용을 다룬 기사

(1924년 <신한민보>)

alt

자필 회고록 『노병 김규면 비망록』

alt

김규면과 아들 김호둔

alt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위치한 김규면의 묘소

alt

말년의 김규면과 독립운동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