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INPUT SUBJECT

글 박영규 작가
을사늑약과
들불처럼 번져간 의병전쟁
국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나섰던 감격의 그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난 지 어언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월간 『독립기념관』은 2019년 3월까지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을 통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일제의 불법적인 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을사늑약은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에 강제로 체결된 한일의정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한국에 불법적으로 군대를 상륙시키고 대한제국의 행정을 장악하였으며, 그해 8월 22일엔 국권 강탈의 서막이 된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재정과 외교의 실권을 박탈했다. 또한 1905년 2월에는 독도를 군사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시마네현의 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편입시키는 영토 침략을 감행했다. 편입 이전까지 독도는 1900년에 황제의 칙령으로 ‘석도(石島)’라는 이름으로 울릉도에 예속되어 있었다. 영토 편입을 통해 일본은 러시아와 해상전에서 지리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묵인한다는 미국의 약속을 얻어냈다. 그해 8월 12일엔 1902년에 이어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일본의 한반도 보호국화에 대해 양해를 얻어냈다.이렇듯 일제는 한국을 식민화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를 마친 후, 광무황제를 협박하여 늑약을 체결하려 하였다. 하지만 광무황제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자 을사오적 권중현·이근택·이완용·이지용·박제순을 앞세워 강행했다.하지만 이 조약을 체결한 박제순은 광무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바도 없고, 비준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이 조약은 당연히 무효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조약을 근거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두어 행정을 마비시켰으며, 전국의 지방 행정까지 모두 장악하여 감독하였다.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황성신문>의 주필을 맡고 있던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행위와 오적의 매국행위를 강력하게 규탄하였다. 광무황제는 미국인 황실 고문 헐버트를 통해 이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였고, 국민들도 일제히 궐기하여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한일의정서 체결 기념사진

을사오적(권중현·이근택·이완용·이지용·박제순)

을사늑약 전문

시일야방성대곡(1905년 <황성신문>)
들불처럼 번져간 의병운동
을사늑약으로 한국인의 반일 감정은 극도로 달아올랐고, 그것은 결국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의병운동으로 이어졌다. 의병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강원도 원주 동부의 주천이었다. 이곳은 을미의병 당시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킨 곳이었는데, 당시 유인석 휘하에서 활동하던 원용선과 박정수 등이 주축이 되어 다시 의병진을 꾸리고자 했다. 하지만 의병진을 편성하자마자 원주의 진위대와 일진회의 공격을 받아 흩어지고 말았다.이후 충청남도 홍주에서는 민종식과 안병찬이 의병을 일으켰다. 안병찬이 1906년 3월 수천 명의 홍주 의병을 규합하여 홍주성을 공략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 민종식이 5월에 재차 공격하여 마침내 점령에 성공했다. 이후 의병들은 홍주성에서 12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홍주성 패전 다음 달인 1906년 6월에는 전라도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최익현이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의 의병 부대는 정읍·순창·담양으로 진출하였고, 이후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와 일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최익현과 의병들은 자국 군대와 싸우는 것을 피하려고 진군을 망설였고, 그 사이에 진위대의 급습을 받아 패전하고 말았다.
한편, 경상도에서는 신돌석과 정환직이 영해와 산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고 있었다. 신돌석은 1906년 4월에 영해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정환직의 산남 의병과 연합하여 동해안 일대에서 항일전쟁을 벌였다. 신돌석 의병의 규모는 3,000명이 넘는 대부대였고, 전술 능력도 뛰어나 일본군을 몹시 괴롭혔다. 또한 정환직의 아들 정용기는 영천일대로 진출하여 수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항일전쟁을 수행했다. 경주에서도 유시연이 의병대를 꾸려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이때 경기 지역에서는 죽산과 안성을 기반으로 박석여의 의병 부대가 일어났고, 양평과 여주에서는 이범주 의병 부대가 활약했다. 또한 강원도 양구와 홍천에서는 각각 최도환과 박장호가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였다.이렇듯 전국 각처에서 크고 작은 의병 부대가 활동하는 가운데, 1907년 8월 1일 우리나라 군대의 해산령이 떨어졌다. 이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운동에 가담하면서 항일 투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유생 출신의 의병대장이 대다수였던 상황에서 군인 출신 의병대장들의 등장으로 전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조직력과 무기를 다루는 능력도 훨씬 좋아졌다. 또한 종래에 의병과 진위대가 서로 총칼을 겨누었던 양상도 사라져 항일투쟁의 대오가 훨씬 안정되었다.원주 진위대 출신 민긍호·박준성·손재규 등은 각각 의병부대를 일으켜 강원도·충청도·경기도 일원에서 항일투쟁을 이끌었고, 강화 진위대 출신 군인들은 연기우를 주축으로 임진강 유역의 포천과 연천 일대에서 항전하였다.여기에 기존에 활동하던 신돌석·이강년 등은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호남 지역은 장성에서 기삼연·나주에서 전해산·함평에서 김태원과 심남일·무주에서 문태수·임실에서 이석용이 의병 부대를 이끌고 항일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한편, 충청도와 전라도 접경지 지역인 공주·회덕 등에서는 김동신의 의병 부대가 활약했다.경기 북부 지역과 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에서도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경기도 장단의 김수민 의병 부대는 황해도 일대까지 넘나들며 항일 전쟁을 수행했고, 평산에서 일어난 박정빈과 이진룡 부대도 황해도를 오가며 전투를 벌였다. 평안도에서는 김여석 의병 부대가 덕천과 맹산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채응언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접경지역에서 활약했다. 함경도에서는 홍범도와 차도선이 삼수와 갑산을 중심으로 산포수와 광산노동자를 규합하여 의병활동을 했으며, 경원에서는 최재형·이범윤·엄인섭·안중근 등이 의병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홍주성 수복 기록화


일본경찰에 체포된 채응언
전국 의병 부대의 연합
이렇듯 전국 모든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남에 따라, 1908년 무렵엔 전국의 의병 부대가 연합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 작전을 추진한 인물은 관동의병장을 맡고 있던 이인영이었다. 이인영은 전국의 의병 부대를 연합하자는 격문을 돌렸고, 이에 호응한 각 도의 의병들이 양주의 대진소로 모여들었다. 양주에 모인 의병은 총 48진으로 병력 규모는 1만 명에 달했다. 이후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13도창의군이 결성되었고, 마침내 1908년 1월에 서울진공작전이 이뤄졌다. 이 작전의 선봉은 강화도 의병대장 허위였다. 그는 300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패퇴하였고, 결국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며 항전했으나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하거나 해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의병 부대를 이끌던 의병대장들이 체포되거나 자결하였고, 13도창의군 총대장을 맡고 있던 이인영도 1909년 6월에 황간에서 체포되었다.

13도창의군 총대장 이인영

13도창의군 서울 진격전 모형
서울진공작전을 기점으로 일본군은 의병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였고,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두 달에 걸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전국 각지의 촌락을 습격하여 주민들을 무차별 살육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도 의병들은 연해주와 간도 지역을 옮겨가며 항전을 지속하였고, 이후 독립군으로 전환되어 광복전쟁을 수행하는 중추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박영규
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