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여성독립운동가 이혜경의 인생역정
둘,손기정 선수와 일장기 말소 사건

하나,여성독립운동가 이혜경의 인생역정<BR />둘,손기정 선수와 일장기 말소 사건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글 윤정란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연구원


여성독립운동가 이혜경의 인생역정


이혜경은 1890년 1월 18일 황해도 해주에서 5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국내 곳곳을 이사 다니면서 다양한 환경과 문화를 접하며 자랐고, 일본에서 유학하는 등 신여성으로 자랐다. 이는 여성독립운동가로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여교사가 되다

아버지는 이창직, 어머니는 안재은이다. 부친 이창직은 한학에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새로운 변화와 문화에 매우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 게일(James Gale)과 성서 번역을 비롯하여 『천로역정』 등의 번역을 함께하였다. 이창직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망명을 계기로 그곳에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성서 번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후 이혜경 가족은 그녀의 외삼촌이 있는 황해도 소래로 이주하여 생활했다. 이창직은 귀국 후 게일의 어학선생 겸 통역사가 되어 서울과 원산 등지로 옮겨 다녔다. 이혜경은 그런 부모를 따라 이사하며 성장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환경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혜경의 『형사사건부』에 본적이 함경남도 원산부 상동 222번지로 되어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899년 게일이 서울 연동교회 목사가 되자 가족도 그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고, 언니 이원경과 함께 사립 연동학교(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로 졸업했다.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과 시세변화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0년 도쿄여자학원 영문과를 졸업하는 신여성이 되었다. 귀국 후 모교인 정신여학교, 이어 함흥 영생여학교, 성진 보신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원산의 마르다윌슨신학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열정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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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마르다윌슨신학교 학생들

        

7형제애국단과 3·1운동

1909년 12월 이재명은 김정익·이동수 등과 함께 친일매국노 암살을 계획하여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단검으로 찔렀다. 이 사건으로 이완용은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었고, 이재명은 현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었다. 이혜경은 옥바라지를 하는 이재명의 부인 오인성을 돕기 위해 모금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고, 고원섭·이자경·이인순·홍은희·최학현·이의순 등과 7형제애국단을 조직했다. 이는 민족선각자 양기탁·임치정 등과 연락을 취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이혜경이 마르다윌슨신학교 교수로 재직할 당시 원산에도 대한독립만세로 천지가 진동했다. 원산 3·1운동 당시 이혜경은 연락책임을 맡았는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김성국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 2통을 각각 정춘수 목사와 원산 배성학교 교장 이가순에게 비밀리에 전달하였다. 3월 1일 원산 장날에 일어난 3·1운동은 함경남도 각 지역의 만세시위를 촉발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막내 동생 이훈규는 당시 여주와 이천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3·1운동 참여는 이혜경에게 모순된 식민지 현실을 직접 체험한 역사현장이자, 자신이 어떠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가늠하는 ‘시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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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참여한 여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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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는 사람들

여성의 사회적인 존재성을 알리다

3·1운동 직후 여성들은 전국 각 지역에서 항일여성운동단체 조직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전국 지부까지 둔 대표적인 단체로는 서울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평양의 대한애국부인회가 있었다. 전자는 1919년 10월 19일 김마리아의 숙소에서 여성계 대표 16명이 모여 조직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정신여학교 출신이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비밀회합을 통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탄생과 임원 선임까지 급물살을 탔다. 회장은 김마리아, 부회장은 이혜경이 맡았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활동 목적과 정신을 밝히는 취지서는 김마리아가, 본부 및 지부 규칙 등은 김마리아·이혜경·총무 및 편집장인 황애덕 세 사람이 함께 작성하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활동한지 불과 한 달 남짓 만에 회원 수는 급증하였다. 이들은 하와이에도 지부를 설치하여 국외 항일세력과 연대를 도모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또한 본부와 각 지부에서 모금된 약 6,000원이라는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활동영역을 점차 넓혀가던 중 11월말 일제에 발각·체포되었다. 취조를 받은 사람은 총 52명, 43명은 불기소로 풀려나고 이혜경을 비롯한 9명만이 기소되었다. 이혜경은 2년 가까이 미결수로 있다가 재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1921년 출옥 후 원산 마르다윌슨신학교에 복직하였다. 이후 김성국과 결혼하여 대구에 거주하면서 교회와 사회봉사로 일생을 보내다 1968년 1월 4일 세상을 떠났다. 1990년 정부는 이혜경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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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애국부인회(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혜경)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손기정 선수와 일장기 말소 사건


1936년 8월 9일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심판이 시작 신호를 알리자, 세계 28개국 51명의 선수들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는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가 있었다. 이들은 나라를 빼앗긴 국민이었기 때문에 한국 대표로 올림픽에 나갈 수 없었다. 때문에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일본 대표로 경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역전의 드라마를 기록한 손기정과 남승룡

당시 강력한 우승 후보는 아르헨티나의 자바라 선수였다. 그는 경기 시작부터 앞으로 쑥쑥 나가 1등으로 달리고 있었다. 반환점에 이르러서도 순위는 바뀌지 않았다. 반환점까지 자바라의 기록은 1시간 8분, 손기정의 기록은 1시간 12분이었다. 4분이나 뒤쳐져 있을 동안 손기정은 4위권이 었고, 남승룡은 24위였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두 선수는 힘을 내기 시작했다. 남승룡은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무려 13명의 선수들을 제치며 끈질기게 쫓아왔고, 손기정은 32km 지점에서 영국의 하버와 함께 자바라를 앞질렀다. 한동안 하버와 나란히 달리던 손기정은 죽을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버마저 따돌리고 선두에 섰다. 하버는 따라잡으려 했지만 도저히 앞지를 수 없었다. 손기정은 달릴수록 속도를 더 올린 것이다. 결국 하버는 2위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이마저도 안심할 수 없었다. 어느새 많은 선수들을 제치고 3위에 선 남승룡이 무섭게 뒤쫓아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기정은 하버를 여유롭게 따돌리고 결승점이 보이는 베를린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경기장 안은 함성으로 가득했다.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와 환호성으로 그를 맞이했다. 손기정은 마침내 1등으로 결승점에 들어왔다. 2시간 29분 19초 2, 세계신기록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은 1위를, 남승룡은 3위를 차지했다. 시상대에 올라 선 손기정과 남승룡의 눈에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승리했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태극기 대신 일장기가 달려 있고 눈앞에는 태극기 아닌 일장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한국에도 전해진 감격의 소식

한편, 8월 9일 밤 11시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장맛비가 쏟아지는데도 우산을 쓴 채 동아일보사 건물에 달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생중계에 귀를 기울였다. 이 생중계는 일본 NHK 방송의 전파를 받아 경성방송국에서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계방송은 1시간 만에 중단되었다. 올림픽 중계방송은 저녁 6시 30분과 밤 11시에 각각 1시간밖에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물러가지 않고 신문사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혹시나 신문사에서 마라톤 경기 결과를 알려 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다음날 새벽 2시가 가까워졌을 때 건물 2층 창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여자가 얼굴을 내밀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기뻐해 주세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했어요! 2시간 29분 19초 2, 세계 신기록이에요! 남승룡 선수도 3위를 차지했어요!”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만세! 손기정 선수 만세!” “남승룡 선수 만세!” 손기정이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은 전국 방방곡곡에 전해졌다. <조선중앙일보>는 8월 10일 새벽 손기정의 우승을 알리는 호외를 발행했다. 모든 한국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다

일본의 여러 신문에도 손기정의 우승 소식과 함께 그의 사진이 실렸다. 사진 속에는 시상대에 선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채 올리브나무 화분을 들고 있었다. 운동복을 입은 손기정의 가슴에는 일장기가 달려 있었다. <조선중앙일보>의 기자 유해붕은 일본 신문에 실린 손기정의 사진을 보고 서글픔을 느꼈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국기가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사진 속 일장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 사진을 우리 신문에 실어야 하는데, 일장기를 달고 있는 사진을 그대로 내보낼 수 없어. 손기정 선수는 일본 사람이 아니라 우리 한국 사람이야.’ 유해붕 기자는 마침내 결심했다.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 신문에 내보내겠다고 말이다. <조선중앙일보> 8월 13일자 신문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시상대에 선 손기정의 가슴 부분 일장기가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머리에 월계관을 쓴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좀 봐. 가슴에 일장기가 없어.” “그렇군. 일장기가 감쪽같이 사라졌어. 아무래도 지워버린 모양이야.” 신문이 나왔지만 조선총독부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는지 당장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동아일보> 8월 25일자 신문에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이 실렸다. 동아일보사 체육부 이길용 기자가 신문에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으면서, 삽화 담당 직원인 화가 이상범을 시켜 그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우게 한 것이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조선총독부는 발칵 뒤집혔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일장기가 없잖아! 일장기를 일부러 지웠어!” 조선총독부는 일본 경찰을 동아일보사로 보내 이길용 기자, 이상범 화가를 비롯하여 신문사 간부들을 잡아들였다. 또한 <동아일보>에 무기정간 처분을 내리고 사장 송진우와 부사장 장덕수를 물러나게 했다. 조선총독부는 뒤늦게 <조선중앙일보>에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이 실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유해붕 기자도 감옥에 갇혔고, 조선중앙일보사 사장 여운형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했다가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

오늘날 ‘일장기 말소 사건’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울분을 표현하고 민족의 저항정신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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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 들어오는 손기정과 환호하는 관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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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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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가 지워진 사진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