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답을 찾다
분노하지 않는다는 건
사랑하지 않는 것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분노하지 않는다는 건 사랑하지 않는 것
대한민국 언론사 최초의 종군기자이자, 최초의 순직기자는 누구일까? 그 기록은 19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장덕준에 이른다. <동아일보> 기자 신분으로 훈춘사건을 취재하던 도중 행방불명된 장덕준. 그의 이야기는 언론인의 존재 이유를 말해준다.
참된 언론인의 표본
▲1892년 황해도 재령 출신 ▲1914년 <평양일일신문> 신문부 주간으로 활동 ▲1915년 일본 유학 ▲1920년 김성수, 이상협 등과 함께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 ▲1920년 11월 훈춘사건 취재 도중 행방불명
‘권력의 감시견(WatchDog)’
현대 언론학에서는 언론(言論)의 역할을 이렇게 표현하곤 한다. 언론이 입법·사법·행정에 이은 제4부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론은 자칫 부패할 수 있는 권력을 감시하며, 이들이 올바로 작동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짖는’ 존재다. 권력은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를 제거하려는 속성을 가진다. 이는 시대를 뛰어넘어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장덕준은 진정한 언론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온몸으로 증명한 인물이다. 불과 스물아홉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크고도 깊었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신문 발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고자 계획을 마련했다. 3·1운동이 일어나 던 때 김성수와 함께 인재 양성에 기여하고자 조선 학생들의 외국 유학을 돕는 단체 ‘육영회’ 설립을 추진했고, 이후에는 <동아일보> 창간에 힘을 기울였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시작했지만, <동아일보>는 오래지 않아 일제의 강압으로 정간되었다. 장덕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펜을 놓지 않았고, 취재수첩을 항시 몸에 지니고 다녔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들의 증언은 한결같았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불의에 맞서 싸우고, 취재했으며, 글을 썼다’는 것. 피를 토했다는 말은 비유가 아닌 실제였다. 장덕준은 천형(天刑) 같은 폐결핵을 앓았다. 흥분하면 피를 토하기 일쑤였다. 이런 몸 상태라면 기자생활을 접고 요양을 해야 마땅하건만 그는 끝까지 취재일선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장덕준이란 이름 석 자는 훈춘사건(琿春事件)을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중국 마적단과 내통해 고의로 일본 관공서를 습격하고, 이를 핑계로 만주에 있던 조선인 3만여 명을 학살하였다. 장덕준은 이를 취재하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 신문은 정간된 상태였지만,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곧장 간도 현장으로 달려가 첫 기사를 내보냈다.
‘빨간 핏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계속해서 우리 동포의 참상과 일본군의 잔학성을 취재하던 어느 날, 장덕준에게 일본인 몇 명이 찾아왔고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선 이후로 장덕준의 소식은 영영 끊어져 버렸다. 그렇게 그는 우리 언론사상 첫 순직기자가 되었다. 당시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분노로 증명한 애정
장덕준의 기자 정신은 오늘날의 언론환경과는 맞지 않는 모습이 분명 있다. 그는 언제나 혈기가 끓어 넘쳤고, 민족의 비극 앞에서 언론인이기 이전에 한국인으로서 글을 쓰고 불의에 맞섰다. <동아일보> 창간 다음날인 1920년 4월 2일자부터 10일 넘게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이란 논설을 보면 장덕준을 현대 기준의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언론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는 민족을 대변하는 기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언론과 국민은 장덕준의 행적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장덕준은 기사를 쓸 때 ‘발’로 썼다. 책상 앞에 앉아 사색과 통찰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현장에 뛰어들어 날 것 그대로 부딪힌 분노와 아픔을 글로 옮긴 것이다. 그는 때때로 주변 기자들에게 “그따위 소리를 하고도 나라를 위한다는 놈이라 할 수 있느냐”며 힐난했고, 분에 못 이겨 의자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장덕준의 ‘분노’가 부럽다.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공공의 일을 두고 분노하는 이들을 보기가 어렵다. 하나둘 목소리가 모여야 겨우 남의 의견에 자신의 뜻을 보태 말하는 정도다. 분노라는 건 대상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발현되기 힘든 감정이다. 장덕준의 분노는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사랑하기에 누구보다 분개하고, 안타까워하고, 아파했던 것이다.
언론의 공정성에 대해 많이 회자되는 요즘이다. 공정성을 논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다는 것. 이는 ‘공정성’에 앞서 ‘민족의 대변자’로 살아야 했던 언론환경을 거쳐 왔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장덕준의 인생으로 보자면, 분노하지 않는다는 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불의로부터 느끼는 분노는 행동으로 실현할 때 그 사랑이 증명된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분노하고 이 분노를 행동으로 옮긴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명 더 나아지리라.
이성주
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