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조선총독을 처단하라!
노인들의 의열투쟁을 이끈 독립운동 지도자

글 학예실
조선총독을 처단하라!
노인들의 의열투쟁을 이끈 독립운동 지도자
김치보 金致寶, 1859.9.17. ~ (1941.11.18.)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김치보를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그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노인들의 의열투쟁을 이끌며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성명회 선언과 권업회 활동
김치보(金致寶, 金致甫)는 1859년 9월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50세가 되던 1908년경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였고, 덕창국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0년 8월 나라가 일제에 강제병탄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연해주 한인들은 합병 무효를 선언하고 병탄 반대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성명회를 결성하였다. 성명회는 각국 정부에 강제병탄 무효를 선언하는 전문을 보내는 한편, ‘일본의 침략과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모든 힘과 수단을 다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일제와 끝까지 투쟁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김치보가 성명회 활동에 직접 참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성명회 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보아 성명회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명회는 1910년 9월 일제의 압력으로 해산되었다. 그러나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성명회를 계승한 권업회를 결성하였고, 김치보는 통신부장에 선임되었다. 권업회는 <권업신문> 간행·교육진흥활동·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는 등 연해주지역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단체였다.

러시아 연해주의 신한촌 전경

성명회 선언서(1910년 8월)

권업회 기관지 권업신문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이끌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해주지역의 한국 독립운동은 일제의 종용에 따른 러시아의 탄압 등으로 침체되었으나, 종전 후 활로를 모색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그해 3월 17일 연해주에서도 대규모 만세운동이 전개되며 독립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김치보는 1919년 3월 자신이 운영하는 신한촌 덕창국에서 청년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46세 이상의 연령 제한을 두었을 뿐 남녀를 가리지 않고 회원을 모집하였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국내외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는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독립요구서를 제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강우규를 국내에 파견해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고자 하였다. 강우규의 의거는 실패했지만 국내외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연해주지역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일제는 1920년 4월 기습적으로 연해주지역 독립운동단체에 공격을 감행했고 이때 주요 간부들이 붙잡히거나 도피하면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강우규 의거 당시 남대문역 인파

강우규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명부(1919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