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의 발자취를 찾아서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가다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가다
이른 아침 우리 일행을 태운 차는 푸양(阜陽)에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한국광복군 훈련반이 있었던 곳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우리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훈련 장소인 린촨소학교로 향했다.
학도병에서 탈출한 청년들의 훈련소
린촨소학교는 한국광복군 훈련반이 임시로 훈련했던 장소다. 그래서인지 좌표 33.06815N, 115.25196E 지금은 린촨제일중학교로 바뀐 린촨소학교에 도착하자 과거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에 몸담고자 했던 20대 청년들의 패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한국광복군 훈련반은 안후이성(安徽省) 푸양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징모 제6분처에서 설치 운영한 ‘임시훈련소’였다. 한국광복군 징모 제6분처는 푸양을 중심으로 초모활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성과로 인해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만들어 중국군 제10전구 사령관 탕인보(湯恩佰)와 교섭한 결과, 푸양 근처 린촨(臨川)에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 훈련반에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특설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초모한 인원과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도병을 입교시켜 훈련시켰다.
한국광복군 훈련반의 입교는 일시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우선 푸양에 집결해 있는 인원부터 입교시켜 1944년 5월부터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였고, 이후 초모되거나 탈출한 인원들을 곧바로 린촨으로 데려와 추가 입교시켰다. 대표적으로 장준하·김준엽 등의 학도병들이 있었다.
장준하는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광복을 맞이하기까지의 항일투쟁기를 기록한 『돌베개』를 남겼다. 책 내용 중 등장하는 린촨에서의 생활을 살펴보자.
우리가 떠밀려 들어간 곳은 중국 중앙군관학교 린촨분교로서, 그 안에 한국광복군 훈련반이 특별히 부설되어 있었다. 이 훈련반엔 김학규가 주임으로 있었으며, 이평산·진경성 두 교관이 주임을 돕고 있었다. 약 4개월 전에 설치되었다고 했다. 일본군에 징병되어 중국지역으로 파견 오는 한국 청년들의 수가 많아졌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공작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우리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로부터 명을 받은 김학규가 안후이성 푸양이란 곳에 주재하면서 약 1년 전부터 각종 공작을 폈으며, 탈출 학병 외에도 한국 청년들을 모병하여 상당수가 되자 이곳 린촨분교에 정식으로 군사훈련을 요청하여 특설한 것이 이 훈련반이었다. 그동안 한국 청년은 80여 명이나 집결하였다. 계속적인 모병 공작과 격증하는 탈출 학병으로 해서 훈련반은 열을 띠었다.
『돌베개』 138~139쪽 내용 中

한국광복군 훈련반 제1기 졸업사진
한국광복군 훈련반에서 한국광복군 제3지대까지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 하나만을 가지고 일본군을 탈출했던 장준하를 비롯한 젊은 한국 청년들은 이곳 린촨에서 조국애를 담금질했다. 한국광복군 훈련반의 교육과 훈련은 주로 징모 제6분처의 기간요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군사훈련은 중국군 교관과 중앙육군군관학교 출신의 징모 제6분처 간부인 신송식이 맡아 실시하였는데, 주로 도수훈련(徒手訓練)이 이루어졌다. 정신교육은 김학규를 비롯한 신송식·조편주·이평산 등이 담당하였다. 김학규는 한국 독립운동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혁 및 건국강령을, 사회주의 운동과 연관이 있던 이평산과 난징(南京)에서 <일본동맹통신> 기자로 근무했던 조편주 등은 세계혁명사 및 항일투쟁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정신교육을 실시하였다.한국광복군 훈련반에서의 교육은 1944년 5월 중순부터 11월까지 5개월에 걸쳐 진행되었고, 입교생 전원 48명이 졸업하였다. 정확한 이유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이후 한국광복군 훈련반은 폐쇄되었다. 이들은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졸업한 후 모두 광복군으로 편입하였다. 이들 중 36명은 광복군총사령부가 있는 충칭(重慶)으로 향했고, 푸양에 잔류한 12명은 후일 광복군 제3지대 창설의 바탕이 되었다. 전날 답사한 푸양에서 성립된 한국광복군 제3지대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한국광복군 제3지대 주둔지 터
흔적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사적지에서
이선자 부관장이 학교 측에 연락한 뒤 우리는 서둘러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마치 이곳이 한국광복군 훈련반의 훈련 장소 그대로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정문에서 화단을 지나 과학관 뒤에 훈련반 숙소가 있다고 했다. 지금 학생 기숙사 옆의 공터가 당시 한국광복군들이 훈련한 후 지친 몸을 잠시 누일 수 있었던 숙소였다는 사실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조국을 되찾고자 이를 악물고 훈련했던 청년들의 숙소가 현재 공터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 찾은 곳에서 이는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장준하는 한국광복군 훈련반 전우들이 모두 모국어를 사용해 이곳에 왔을 때 마치 고국에 온 듯한 착각을 했다고 하였다. 그만큼 조국을 찾고자 했던 열의가 가득했던 곳이다.
한국광복군 훈련반의 훈련 장소는 지금 린촨제일중학교의 운동장이었다. 정문에서 과학관을 지나 오른쪽에 보이는 잔디 운동장이 그곳이다. 노천에 탁구대가 있는 것이 특이했다. 10개 정도의 농구대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임공재 사진작가는 학교 전경을 찍기 위해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찾아 나섰다. 지금 독립기념관 사진실에 있는 많은 사진은 임공재 사진작가의 열정으로 탄생했다. 우리는 학교 관계자들에게 한국광복군 훈련반 훈련 장소에 기념비를 설치하여 한중 애국주의 교육 장소로 활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2003년에 건립된 기념비가 철거된 상황 속에서 답사단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관계자들은 좋은 의견이라고 했지만, 언제 설립될 지는 알 수 없다고 답했다.
늦은 점심을 간단히 먹고 푸양으로 돌아와서 이번 답사에 대해 정리했다. 답사는 ‘길에 대한 예의’라고도 한다. 하지만 무작정 길만 걸어서는 그곳에 머물렀던 선열들의 역사를 캐기가 쉽지 않다. 이번 답사 역시 준비는 하였지만 정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는지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푸양과 린촨에서 젊음을 태워 조국을 밝히려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열정이 지금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린촨제일중학교 운동장
상하이에서의 새 출발
상하이는 한국인들에게 소중한 곳이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국호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3·1운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한 한민족의 역동적 표현의 결과물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온 민족이 들고 일어난 거대한 함성이자,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꿔놓은 대역사였다. 뿐만 아니라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남녀노소·계급 등의 차별을 잠식한, 세계 민족운동사에 보기 드문 감동드라마다. 세계 각국의 언론은 3·1운동에 대해 예사롭지 않은 관심을 표하였다. 이처럼 3·1운동이 보여준 성숙한 민의(民意)는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적장자(嫡長子)이다.
10월 14일 12시 10분경 필자는 오대록 박사·김영장 연구원·임공재 사진작가와 한 팀이 되어 상하이 푸둥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임공재 사진작가와 한 몸인 사진용 사다리를 마지막 짐으로 찾고 우리 일행은 준비된 차에 올라 상하이 답사의 첫발을 내디뎠다. 15시 15분. 우리는 마침내 마당로(馬當路)에 위치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에 도착했다.
이번호를 끝으로 새로운 독립운동사적지 조사를 통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