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살피다
보이지 않는 영웅의 모습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보이지 않는 영웅의 모습
독립운동은 눈에 보이는 성과로 평가할 수 없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성공했으나 남자현은 총독 암살에 실패했다.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과 김구가 이끈 한인애국단은 위험을 무릅쓴 도전 끝에 몇몇 의사들이 거사에 성공했지만 그에 앞서 치러진 수많은 실패 역시 고귀하다. 우리는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 장렬히 산화한 위대한 영웅들을 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을 도운 숨은 영웅들은 여전히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다.
파리장서운동과 윤현진
1919년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서거는 3·1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천도교·불교계는 연합하여 민족사에 중요한 분수령을 일구어내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유교계도 3·1운동에 부응하고자 뒤늦게나마 활동에 나섰는데, 바로 ‘파리장서운동’이었다. 유림 대표 137명이 한국독립청원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로 도모한 일이다. 대표적인 유교계열 독립운동가 김창숙은 한국독립청원서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져가 이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한문 원본, 영문 번역본 각 3,000부를 인쇄하여 파리는 물론 중국, 그리고 국내에까지 배포하였다.
윤현진은 당시 한국독립청원서를 우송하는 일과 영문 번역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 유학 당시 조선유학생학우회의 총무를 역임, 학우회에서 발간하던 『학지광』에 글을 발표하는 등 일찍부터 민족애를 강하게 드러냈다. 유학 후에는 대동청년단에 참여하였고 파리장서운동에서도 중요한 조력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섰으며, 또한 개인 재산 상당액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헌납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21년 서른 살의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인재가 단 한 명이라도 귀했던 당시 더욱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윤현진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단

한국독립청원서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 도움을 준 두 사람
백용성은 윤봉길을 상하이로 보내 홍커우공원 폭탄 투척 의거라는 독립운동사의 손꼽히는 쾌거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 다만 그를 윤봉길의 조력자 정도로만 언급하기에는 그가 남긴 족적이 인상 깊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는 불교 대표가 2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백용성이다. 대중에 널리 알려진 한용운과 더불어 3·1운동을 이끈 민족의 선각자이자 한국 근대 불교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백용성은 불교의 분파라고 할 수 있는 대각교를 창시한 조사이자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불교계 독립운동가다. 당시 일제가 다양한 방법으로 불교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상황에서 백용성은 불교 개혁과 대중화를 위해 대각교운동을 전개하였다.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自覺覺他)”
백용성은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중생구제’라는 대의를 독립운동과 일체화시켰으며, 한국 불교의 고유한 측면인 호국불교적 성격 역시 같은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따라서 불교 개혁에 힘쓰는 한편, 또한 독립운동에도 매진한 것이다. 불경의 한글 번역을 위해 노력하고, 농업을 기반으로 자립경제를 구축하여 확보된 자금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자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던 중 윤봉길·김구와 연이 닿아 한인애국단 거사에 숨은 조력자로서 공헌하게 되었다.
김홍일은 한국광복군 총참모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우리나라 무장독립투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이다. 어린 시절부터 만주·연해주·중국 등지의 항일활동에서 활약한 그는 중국 국민당 산하 국민혁명군에 복무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특히 상하이의 병기공장 군기처에서 장교로 일할 당시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를 위해 폭탄을 준비해준 사람이 바로 김홍일이다. 1932년 1월 도쿄에서 일왕이 탄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거는 안타깝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김홍일은 포기하지 않고 중국인 향차도(尙次導)를 통해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 제조를 주도하였고, 이는 1932년 4월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상하이사변 승전기념식에서 벌어진 윤봉길 의거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행사장에는 물통과 도시락 그리고 일본 국기만 들고 갈 수 있었기에, 도시락 폭탄·물통 폭탄을 만들자는 김홍일의 기지가 크게 발휘되었다.

백용성

김홍일

윤봉길 의거에 사용된 물통 폭탄

김홍일(오른쪽)과 중국인 향차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꾼, 정정화
정정화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안주인’과 다름없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대동단 총재로 추대된 시아버지 김가진, 그리고 남편 김의환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정정화 역시 함께했다. 이후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그녀의 인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궤를 같이 하였다.
초기 정정화는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6번이나 국내외를 넘나들며 자금 조달에 적극 임했다. 193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여당의 역할을 하던 한국국민당에 가입하여 공식적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존속하던 20년의 기간 동안 그곳의 살림살이를 꾸려나갔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 등을 전전하던 어려운 시절에는 전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정요인들을 정성으로 보살폈다.
그러던 중 1938년 5월 6일 한국독립당 결성을 위해 우익 3당의 대표들이 모여 회의하는 도중에 이운환이라는 청년이 권총으로 3당 대표를 암살하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김구·유동열·지청천·현익철 등 중요 인물들이 총에 맞아 중경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현익철은 이때 사망하고 김구와 유동열 등은 상아의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당시 정정화는 상아의원에서 이들이 회복하기까지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또한 초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끈 이동녕이 1940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에서 간호하며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
정정화는 안살림만 담당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독립당 창립 당원으로서 남편 김의환과 함께 활동하였고, 한국독립당 여성 조직인 한국혁명여성동맹 간사로 선출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벌였다.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
1943년 2월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 당시 정정화를 포함한 일원들이 주장한 내용이다. 한국애국부인회는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였다. 의연금품을 모아 무력항쟁을 준비하고, 한국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이어나갔다.
광복 이후 정정화의 삶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그랬듯 결코 순탄치 않았다. 좌우 갈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으며 이승만 정부가 제안한 도지사급 감찰위원의 자리도 마다했다. 한국전쟁 도중에는 안재홍·조소앙 등의 여러 민족주의자들과 남편 김의한이 함께 납북되었고 이러한 사정으로 정정화는 부역죄로 투옥,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하는 등 말할 수 없는 고초와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정정화와 외아들 김자동

정정화 가족(김의환, 정정화, 김자동)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1940년 6월 17일,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정화)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