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3·1운동으로 여학생들을 이끈 이아주
둘, 조선 호랑이의 씨를 말리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글 은예린 자유기고가
3·1운동으로 여학생들을 이끈 당찬 이아주
2년 후면 삼천리 금수강산을 만세 소리로 진동시켰던 감격의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한다. 만세운동은 국외 한인사회로 파급되어 당시 외국인에게 ‘낮선 나라’ 한국을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중국은 물론 피압박 민족에게도 독립의 소중함을 절감시켰다. 3·1운동과 3·1운동정신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3·1운동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여성들
근대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여성들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자각하기 시작했다. 종교계의 선교활동 중 여성교육은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완만하나마 여성교육을 통한 각성과 자기혁신은 사회적인 활동으로 이어졌다. 이는 ‘닫힌 사회’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관에 의한 사회질서 모색으로 이어졌다. 대한제국기 여성단체의 활동이나 국채보상운동 당시 여성들의 적극적인 동참은 이를 반증한다. 이러한 소중한 체험을 바탕으로 여성들은 3·1운동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신여성이나 여학생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아낙네도 동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식민지 노예교육의 모순을 인식하다
이아주(李娥珠)는 평안북도 강계 출신이다. 본관은 용인으로 아버지 이봉섭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이아수(李娥洙)·이애주(李愛主) 등이다. 꿈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강계는 국경지대로, 외부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자연스레 바깥 세계의 소식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부모님도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로 자녀들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이아주는 18세에 서울로 올라와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환경의 변화와 번화한 서울거리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자유로운 학교생활을 보냈으나 식민지 노예교육이 지닌 모순도 점차 인식하기 시작했다. 번민과 갈등에도 결코 학창생활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던 이아주. 오늘날 모범생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시위 현장에서 여학생들을 이끌다
만세 함성이 서울 시내에 울려 퍼지던 그날, 이아주는 정신여학교 졸업반이었다. 3월 1일 대규모 만세시위가 있은 후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숨고르기를 하는 정적이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았다. 3월 5일에 제2차 대규모 시위가 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교내는 만세운동과 관련된 소식으로 흥분과 긴장에 휩싸였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이날 아침 9시부터 전개될 예정인 남대문역 부근의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이아주는 남대문역에서 학생과 시민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독립기를 앞세우고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시위 군중과 함께 과감하게 시가행진을 벌였다. 지나가는 시민들도 가세하는 등 독립에 대한 열망은 그 기세가 대단했다. 그녀는 동지들과 함께 30여 명의 여학생을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나아갔다. 너무도 감격스러워 눈물이 앞을 가렸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곧 독립이 되리라는 기대로 충만해진 순간이었다. 질서정연한 시위대를 보면서 한민족의 위대함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정신여학교 학생들
자유와 평화로운 독립국을 꿈꾸며
일제는 광분하여 시위대 해산에 나섰다. 기마대를 동원한 폭력적인 방식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아주는 동지들과 함께 현장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서 유치장은 이른바 주동자로 초만원이었다. 그곳에서는 민족적인 멸시와 모욕감을 주는 살인적인 취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이 만세를 부른다고 독립이 될 줄 아느냐!” 일제 경찰은 윽박지르고, 음흉한 시선과 비아냥거림으로 참기 어려운 인격 모독을 안겼다. 이아주는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언젠가는 꼭 그리고 반드시 될 줄 안다”고 답변하며 주저함이 없었다. 취조하던 일제 경찰은 그 기세에 눌려 약간 풀이 꺾였다.
그녀는 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서대문감옥으로 넘겨졌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수감되어 있었다. 미술가로 알려진 나혜석을 비롯하여 어윤희·권애라·신관빈·심명철·신진심·강기정 등과 함께 예심판결을 받고 복역하였다. 고통스러운 감옥생활에도 서로 격려하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병문안 인연으로 김성수와 일가를 이루다
이아주는 만세운동 가담 혐의로 6개월 징역형을 언도받고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으나, 병으로 1920년 3월 22일에 가출옥했다.
이아주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을 때 김성수가 문병을 왔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후일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김성수는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이자,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녀 양육과 남편 뒷바라지에 알뜰한 내조자가 되었다. 만년에는 중풍과 뇌출혈로 고생하는 남편을 극진하게 간호하였다. 정부는 3·1운동에 참여했던 이아주의 공로를 인정하여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조선 호랑이의 씨를 말린
야마모토 정호군
1917년 11월 3일자 <매일신보>에는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일본 고베의 ‘송창양행’이라는 회사의 사장 야마모토 타다자부로가 호랑이를 사냥하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조선 땅에 온다는 것이었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일제의 호랑이 사냥
거액을 들여가면서 이런 대규모 호랑이 사냥을 벌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암울한 시대 상황과 경제 침체로 인해 사기가 꺾인 ‘일본제국 청년들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조선에서 호랑이를 사냥하기로 결정한 것은, 3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원정을 떠났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영향이었다. 추위를 피해 북관(北關)에 대군이 머무를 때 그가 땅에 떨어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자 대규모 호랑이 사냥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 자신이 선봉으로 나서 큰 호랑이 한 마리를 거꾸러뜨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쇠약해지는 군대의 기세를 다시 떨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어릴 적 이 이야기를 들은 야마모토는 자신도 조선에서 호랑이를 사냥해 일본 청년들의 사기를 드높이겠노라 마음먹었다.
호랑이 사냥에 나선 야마모토 정호군(征虎軍)은 1917년 11월 12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야마모토가 지휘하는 이 원정대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보름 동안 온 조선 땅을 누비고 다녔다. 특히 집중적으로 활동한 곳은 가토 기요마사가 호랑이 사냥을 했다고 전해지는 함경도 지방이었다. 야마모토 정호군의 선봉으로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조선인이었다. 강용근·이윤회·최순원 등 당시 호랑이 사냥으로 이름을 떨치던 명포수들이었다. 사냥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호랑이를 포함해 표범·곰·멧돼지·노루 등 갖가지 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포획했다.
야마모토 정호군은 12월이 되어 경성으로 올라왔다. 조선호텔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해산식을 겸하여 호랑이 고기 특별 시식의 만찬이 열렸다. 조선총독부의 야마가타 이사부로 정무총감을 비롯하여 이하 각 부 장관·귀족·은행사 중역·신문기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사냥으로 잡아온 여러 동물들로 만든 요리가 선보여졌다. 가장 인기를 끈 것은 ‘천하일품의 진기한 요리’라고 칭해지는 호랑이 고기로, 사람들은 맛이 훌륭하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조선 호랑이 사냥의 시작
일본인이 조선 땅에서 조선인 명포수들을 앞세워 조선의 호랑이를 마구잡이로 사냥하고, 그것도 모자라 총독부 고위 관리들과 친일파 인사들을 모아 시식회까지 열었다니,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로서는 그들의 행태에 분노가 치미는 게 당연하다.
일본의 조선 호랑이 사냥은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병에 걸려 몸져누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원정을 떠난 장수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다음의 편지를 보냈다.
내가 몸져누운 지 1년이 되어간다. 듣자 하니 내 병을 고치는 데는 호랑이 고기가 명약이라지. 조선에만 있는 호랑이를 잡아 그 고기를 구워 먹으면 내 병이 씻은 듯이 낫는다는구나. 약으로 쓸 호랑이를 잡아 소금에 절여 보내거라.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편지를 받고 곧장 호랑이 사냥을 시작했다. 다른 일본인 장수들도 그를 따라 사냥에 나서 호랑이 고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또 야마모토 정호군의 영감이 된 가토 기요마사는 1592년 6월 함경도에 진을 치고 있던 중 늙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막사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보고 창을 들고 나가 물리쳤다고 전해진다. 그때 호랑이가 물어 부러뜨렸다는 ‘편겸창’은 가토 기요마사의 상징으로, 현재는 구마모토 현에 있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제국주의 야욕으로 드러나다
기록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인 1915년부터 1942년까지 총97마리의 호랑이가 희생되었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사냥한 호랑이가 한반도 남쪽에서의 마지막 호랑이로 알려져 있다.
조선 호랑이 사냥의 근본적인 이유는 소영웅주의·부의 과시·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확산이라 볼 수 있다. 야마모토 정호군은 조선 호랑이를 마구 죽이며 식민지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과 러시아까지 침략하겠다는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일제는 맹수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을 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한민족과 함께 살아온 동물을 멸종시킴으로써 우리 민족의 정기를 빼앗겠다는 비열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호랑이 사냥꾼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