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살피다

나눔을 통해 실천한 독립운동

나눔을 통해 실천한 독립운동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나눔을 통해 실천한 독립운동


독립운동 역시 돈이 드는 사업이다. 고종황제가 각종 의병운동자금을 은밀히 지원했던 일이나 신민회(1907)나 대한민국임시정부(1919)를 만들 때 안창호가 미주 지역에서 자금을 모금한 것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즉 다양한 형태의 기부와 나눔이 있었기에 독립운동이 이어질 수 있었다.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헌납한 양반들

이회영 일가의 헌신은 최근 들어 널리 알려졌다. 일제의 조선 병탄이 확실해지는 시점에 이회영 일가는 가족회의를 열고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자금을 모았다. 오늘날 300억 원에서 500억 원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하니 당시 사회적 위치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회영을 비롯한 6형제와 식솔 50여 명은 마련한 자금을 들고 만주로 망명하였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제가 ‘독립운동은 천한 것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비하하는 내용을 선전하고, 다수의 조선 양반들이 친일 작위를 받아들이며 일제에 순응하던 상황 속에서 이회영 일가의 망명은 적지 않은 사회적 여파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과 같은 경주 최부자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든든한 자금줄이었다. 경주최씨 집안은 조선 후기 이앙법을 비롯한 신농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대지주로 성공한 대표적인 가문이다. 큰 부를 이룬 만석꾼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지만, 그보다도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며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었던 선행들이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최부자 12대손인 최준은 안희제를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인물이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기업인 백산상회, 무역선박회사인 이륭양행 등의 도움을 받아 국내에 정보를 전달하고 자금을 모금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특히 백산상회를 이끌던 안희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은 물론 재정 상태를 관할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군자금을 지원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최준은 안희제를 도와 자금처 역할을 도맡았고, 그의 동생 최윤과 최완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한편 자신의 선행을 철저히 숨긴 인물도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동인이었던 김성일의 13대손인 김용환은 평생을 노름에 빠져 기행을 일삼으며 지내 ‘파락호(破落戶)’라 불렸다. 아내가 아이를 낳는 순간에도 땅 700마지기를 노름으로 날리는가 하면,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논밭 18만 평을 노름 때문에 한순간에 팔아먹기도 했다. 심지어 하나뿐인 딸이 시집을 갈 때 시댁에서 장롱을 사오라고 준 돈까지 노름판에서 다 써버린 일도 있었다. 그렇게 평생을 난봉꾼으로 손가락질 받은 김용환의 진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밝혀졌다. 노름으로 모두 날려버린 줄 알았던 재산이 실은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였던 것이다. 김용환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명문가의 종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가문의 땅을 팔아먹는 등 겉으로는 온갖 파락호 노릇을 하면서 실제로는 막대한 자금을 독립운동을 위해 기부했다. 광복 후 1946년 세상을 떠난 김용환은 임종 무렵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말에도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할 필요 없다”며 끝내 모든 사실을 숨긴 채 숨을 거두었다.

1920년대 중반 만주에 설립된 독립운동단체 신민부의 자금을 모금하던 과정 중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27년 김병연은 밀양의 부자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김태진에게 만주의 땅을 구입하자고 3,000원을 받아낸 후 신민부에 보냈다. 일명 '김병연' 사건으로, 그 금액은 신민부 역사상 단일 자금으로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나라의 위기 앞에서 일부 양반 가문은 자신의 재산을 내놓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의 헌신적인 행동은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리는 밀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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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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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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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교동 최부자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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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오른쪽)과 동생 최윤



국채보상운동과 물산장려운동

애국계몽운동 혹은 실력양성운동의 차원에서 역사에 기억될 만큼 전국 규모로 발전했던 모금도 있다. 1907년 대구 갑부 서상돈의 800원 쾌척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양기탁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의 적극적인 지원과<황성신문>, <제국신문>의 참여, 그리고 민중의 적극적인 참여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국가 채무 1,300만 원을 갚기 위한 모금운동이었다. 더불어 금주, 금연운동도 벌이면서 짧은 기간 동안 온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채보상운동은 통감부의 방해로 실패했다. <대한매일신보> 사주였던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을 추방하고 발행인 양기탁을 기금 횡령 혐의로 고소하면서 운동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국채보상운동은 그 규모와 더불어 부녀자들이 참여하는 등 여성들이 운동을 주도하며 경제구국운동을 벌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국채보상운동 이후에는 물산장려운동이 있었다. 1920년 일제는 일본 자본의 한국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회사령을 철폐하고, 1923년에는 관세를 철폐했다. 1927년에는 신은행령이 통과되면서 본국과 식민지 조선 간의 무역장벽이 사라졌다. 이를 통해 미쓰이, 미쓰비시 같은 거대 일본 자본이 본격적으로 식민지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물산장려운동’이 벌어졌다. 자금모금운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국산품 애용운동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조선 산업을 보호하고 민족 자본의 축적을 도모하고자 했다. 국산품 애용 원칙을 만들고, 강연회나 선전행사를 통해 평양과 서울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하는 가운데 이때도 금주, 금연운동을 벌이면서 생활개혁운동도 함께 진행했다. 서울에서 주도된 민립대학설립운동이나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에 활발했던 농촌 지역의 한글보급운동 또한 이런 활동의 연장선이었다. 직접적인 자금 모금과 더불어 국산품 구입, 재능기부 등 나눔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경제민족주의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역사에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대표적인 예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진행된 금모으기 운동이다. 국가적 위기를 국민들의 노력을 통해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국채보상운동 90년 후에 똑같은 형태로 발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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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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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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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장려회의 선전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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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산장려운동 광고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자금 지원 운동

하와이, 샌프란시스코로 대표되는 캘리포니아 그리고 멕시코 일대를 일컫는 미주 지역은 사탕수수 농장이 널리 분포되어 있는 지역으로, 많은 한인들이 농장 노동자로 이민을 갔던 곳이다. 1902년 12월 121명의 한인이 인천항을 떠났다. 24명이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97명이 최초로 하와이에 도착했다. 1903년부터 1905년 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하와이에 7,266명, 멕시코에 1,033명 등 8,000여 명에 이르는 한인들이 미주에 정착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본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자치 기구를 조직하며 생존을 도모해나갔다. 에오친목회, 공립협회 등을 창설하고 한인합성협회, 국민회 등을 거쳐 1910년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대한인국민회를 비롯한 미주의 한인 조직은 독립운동의 주요 자금처였다. 1919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자금은 8만5,000달러였는데 이중 절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해 쓰였다고 한다. 하와이에서 결성된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의 경우, 파인애플 농장의 수익금과 지원금을 통해 7만8,642달러를 모았는데 이 중 2만200달러는 만주 및 연해주의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여성들의 노력도 덧붙여졌다. 하와이의 여성독립운동단체 대한부인구제회가 1920년부터 1930년까지 대한군정서, 대한독립군 그리고 임시정부에 보낸 후원금은 20만 달러를 웃돈다. 이밖에 워싱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담당기관인 구미위원부는 1920년대 초반 총수입의 15% 정도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냈고, 북미대한인국민회는 1941년부터 1945년 사이에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4만 달러의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한인들의 열악했던 형편을 고려했을 때 결코 쉽지 않은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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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도산안창호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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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부인구제회(1919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위는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활동이었다. 수많은 지사와 독립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자기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사가 이어져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