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독립기념관 4월호
사(史)적인 여행

우리나라의 교류와
항쟁의 역사가 깃든

충남 예산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부드러운 곡선의 산이 길게 이어지고 넓게 펼쳐진 들판을 적시는 강과 개천이 흐르는 땅, 충남 예산. 

이곳은 삽교천이 지나고 예당호가 있으며 수덕사로 유명하다. 이러한 예산의 푸근한 모습과는 달리 이 땅에서 만나는 역사는 뜨겁다. 

그 뜨거움의 원인은 이 지역 역사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욕망과 열정, 그리고 애국심이다. 그러한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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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추사 김정희의 옛집, 추사고택

처음 살펴볼 곳은 추사고택이다. 추사고택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추사 김정희의 옛집이다.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글씨, <세한도>와 같은 그림, 금석학 등에 능했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24살 젊은 나이에 청에 다녀온 이후 중국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추사고택의 사랑채와 안채는 원래 있던 것이고 문간채와 영당이라고 부르는 사당은 1970년대에 복원한 것인데, 양반 가옥 그리고 한옥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정갈한 한옥인 추사고택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랑채 앞에 있는 ‘석년’이란 글씨가 있는 돌기둥이다. 이 돌기둥은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알 수 있는 해시계의 역할을 했다. 

추사고택 옆에는 자그마한 무덤이 하나 있으니 바로 김정희와 두 부인의 합장묘다. 김정희는 첫째 부인 한산이씨와 사별한 뒤 둘째 부인 예안이씨와 혼인을 했다. 김정희는 영광의 시기를 뒤로 하고 말년에는 정치에 휘말리며 어려움을 겪어서 북청, 그리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과천에서 짧은 여생을 보냈는데, 이때 스스로 ‘과로(果老)’ 곧 과천의 노인이란 뜻의 호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1856년 과천에서 생을 마감했다. 1937년, 지금의 추사고택 옆으로 무덤을 옮겨오며 부인과 합장을 해서 지금의 무덤을 만든 것이다. 곧 추사고택은 김정희가 태어난 곳이며, 또 죽은 뒤에 머문 곳이기도 하다. 


주소 & 문의

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 041-339-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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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좌), 백송공원(우)

효심보다 컸던 옹주의 절개,화순옹주 홍문

추사고택은 충청도 53개 고을의 도움을 받아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김정희의 가문이 예사롭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한 내력을 살피기 위해서는 추사고택 옆으로 난 산책로로 걸어가야 한다. 바로 화순옹주 홍문(열녀문)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화순옹주는 영조가 정빈이씨 사이에서 얻은 둘째 딸이다. 첫째 딸은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화순옹주는 영조에게 첫째 딸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딸이 당시 명문가인 경주김씨 가문의 김한신과 혼인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한신은 총명하며 인물도 출중했다고 한다. 이야기 속 주인공 김한신은 바로 김정희의 증조부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공주나 옹주가 혼인하는 것을 ‘하가(下嫁)’ 곧 ‘내려서 혼인한다.’라는 표현을 썼다. 아무리 명문가라고 하더라도 왕실보다 격이 낮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부마가 된 김한신을 월성위로 봉하고 고향인 예산에 땅을 내려주었는데, 이때 예산에 지금의 고택을 지었으니 왕실과 연결된 집이라 충청도의 여러 고을에서 도움을 준 것이다.

동갑내기였던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사랑은 각별했다. 혼인한 지 16년이 되던 해, 김한신이 38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 역시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이때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살던 곳은 한양의 적선방 일대였다. 화순옹주가 일주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급하게 거둥하여 화순옹주를 만나서 음식을 먹도록 명을 내렸지만, 화순옹주는 계속 식음을 전폐하다가 14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러한 화순옹주의 모습은 조선시대 기준으로 ‘열녀’이다. 그러나 영조는 화순옹주, 곧 김한신 가문에 열녀문을 내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영조는 자신의 명을 어긴 옹주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다른 6명의 옹주를 염두에 두었을 것 때문이리라. 한참 뒤, 정조 때 지금의 열녀문을 내리고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때 열녀문과 함께 사당을 지었는데, 사당은 불에 타서 사라지고 문만 남아있다. 참고로 화순옹주는 조선 왕실의 유일한 열녀이다.


주소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7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와 백송공원

추사고택에서 화순옹주의 열녀문, 홍문(紅門)으로 가는 길에 조그마한 무덤 하나가 있다. 바로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 무덤이다. 화순옹주 홍문 옆으로는 다시 백송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김정희의 고조부가 되는 김흥경의 무덤이 있어, 청에서 가져온 백송을 이곳에 심었다고 한다. 청과 인연이 깊었던 인물, 김정희를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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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묘

효심보다 컸던 옹주의 절개,화순옹주 홍문

다음으로 만날 곳은 추사고택과 달리 조금은 복잡하면서 소란스러운 느낌을 주는 곳이다. 바로 가야산 자락에 있는 무덤, 명당으로 알려진 남연군의 묘다. 흥선대원군이 ‘흥선군’이던 시절인 1844년, 원래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예산으로 옮겨온 것이다. 흥선군은 형제들과 상의해 당대 최고의 지관을 통해 좋은 무덤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이때 지관은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땅과 광천 오서산에 만대의 영화를 누리는 땅을 알려주었는데, 흥선군은 황제가 나오는 땅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무덤을 만드는 과정에는 난관이 있었다. 무덤을 쓰려는 자리에 가야사란 큰 절이 있었으니 절을 허물고 승려를 내쫓아야만 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때 인근의 상하리 미륵은 가야사 쪽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관을 쓰려고 하는 자리에 바위가 많아 도끼로 바위를 내리치자 비로소 공간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남연군의 묘는 풍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명당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무덤 뒤로 가야산 석문봉이 주산이 되고 오른쪽과 왼쪽에 옥양봉, 원효봉이 있고 앞쪽에는 봉수산이 안산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무덤을 쓰고 나서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 고종이 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고종과 순종이 황제로 즉위했으니 지관의 말은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주소 & 문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5-28 | 041-339-8930


독일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던 사건

1868년, 유대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고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일명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다. 오페르트는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기 전, 조선과 통상을 위해 두 번에 걸쳐 아산만을 탐사하고 해미의 현감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통상 요구가 실패하자 다른 방법을 썼다. 당시 권력자인 흥선대원군을 협박할 방법으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수만 근의 석회를 부어 만든 무덤은 단단했으며, 마을 주민이 저항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을 통해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로 인해 서양을 오랑캐로 여기며 척화를 내세운 흥선대원군의 야망과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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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애국정신이 깃든,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마지막으로 예산의 뜨거운 열정, 애국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살펴보자. 바로 윤봉길의 옛집과 기념관, 그리고 사당이다. 1932년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벌인 의거는 독립운동의 방향과 수준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32년 이전까지 독립운동은 여러 면에서 어려움이 있었으니 대체로 다른 나라가 한국과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외면받았고, 나라 잃은 한국인들은 중국에서 차가운 시선을 받기 일쑤였다. 더 나아가 중국과 중국인은 일제의 식민지라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벌이는 한국인을 일본인과 같이 보거나 혹은 일본인의 간첩으로 보기도 했다. 당시 독립운동가가 중국에서 활동할 때 어떠한 어려움을 겪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이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해 중국 상하이를 침략했다.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상하이의 공원에서 벌일 계획을 세웠다. 패전을 눈앞에 둔 중국인으로서는 참담함을 느낄만한 상황이었다. 이때 한인애국단 단원인 윤봉길이 일본군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것이다. 이 의거로 상하이 주둔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가 사망하며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충격을 받은 일본은 급히 중국과 휴전을 진행할 정도였다. 

이후 중국의 국민당 정부와 중국인은 한국과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리고 두 나라의 협력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한 청년의 희생과 열정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 그 청년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고향이 바로 예산이다. 지금 윤봉길 의사 기념관 건너에는 윤봉길 의사가 어렸을 때 살았던 광현당, 그리고 청년 시절까지 시간을 보낸 저한당이 있다. 특히 저한당은 ‘한국을 구한다.’라는 뜻이니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이전에 이미 큰 뜻을 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생가 영역을 둘러본 뒤 윤봉길 의사의 일생과 독립운동을 기리는 기념관을 참관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사당, 충의사로 발길이 이어진다. 향을 피우며 뜨거운 애국심으로 삶 전체를 던진 윤봉길 의사를 기려보는 것은 어떨까.


주소 & 문의 & 관람 시간 & 관람료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 041-339-8238 | 3월~10월 09:00~18:00,  11월~2월 09:00~17:00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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