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책임진 청년들
이희경·나용균·황기환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1919년 4월 11일 3·1운동의 결실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국제적인 외교활동에 힘썼다.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독립문제를 국제사회의 주요 사안으로 부각시키는가 하면, 각국 정부 및 주요 인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희경, 나용균, 황기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부문에서 활약하며 한국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하비로霞飛路 321호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1919)(좌), 『구주의 우리사업』 (1920)_국립중앙박물관 제공(우)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이희경
이희경은 1889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0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11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총무로 활동하며 지방회의 자치제도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1919년 4월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대한적십자회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1920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세계적십자회 총회에 간도참변의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 전권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러시아 정부와 교류하고 자금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3년 독일에 머물며 의학 공부에 매진하던 이희경은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어려운 처지의 한인 유학생을 위한 지원금 모금에 힘썼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독립장을 추서했다.
대한적십자회 제1기 간호원 사진 (1919.8.)_대한적십자사회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전을 위해 활동한 나용균
나용균은 1895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에서 유학 중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2·8독립선언서 발표를 지원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 법제위원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 관제 및 헌법 개정을 위해 힘썼다. 1922년 1월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같은 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전을 위해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가 결성되자 나용균은 위원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의 조직적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선언(1922.5.10.)
한국의 독립의지를 알린 외교관, 황기환
황기환은 1886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고,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영문 이름 Earl.K.WHANG으로 활동했다. 1905년에 공립협회 레드랜드 지회 부회장으로 활약하였고,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자원병으로 입대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당시 한국의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해 조직된 파리위원부의 서기장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10월 프랑스 인권옹호회에 참석해 한국독립 문제를 논의하였다. 1920년 9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런던위원부 위원으로 임명되어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황기환은 영국 언론인 맥켄지(Frederick A. Mckenzie)와 함께 ‘대영제국 한국친우회’ 결정을 주도하여 한국 내 실정을 알리고 지지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파리위원부 사진(1919)(좌),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한국민의 청원서」 (1921.6.)(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