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독립기념관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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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운동,
출발 100년을 맞이하여

 
글 조미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조선시대 백정은 가축을 도살하거나 가죽 따위를 만들어 파는 천민 계층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 제도가 철폐되며 백정이라는 신분은 제도상에서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다. 이는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23년 4월, 드디어 백정들이 형평사를 창립하여 ‘형평’을 외치기 시작했다. 바로 형평운동의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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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 제6회 정기대회(1928년) 포스터


100년 전 4월, 옛 백정들은 왜 형평사를 조직해야 했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조선에서 신분 제도가 철폐됨에 따라 백정이라는 신분도 제도상으로는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896년 <호구조사규칙>이 반포되면서 ‘옛 백정(이하 백정)’들도 조선인 일반인(이하 일반인)과 같이 호적에 이름이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백정과 승려에 대해서는 일반인과 다른 별도의 호적이 만들어졌다. 심지어 백정은 호적의 직업란에 ‘도한(屠漢/屠汗)’ 또는 ‘농업(백정)’이라고 기록되어 그들의 옛 신분이 그대로 드러났다. ‘도한’은 백정에 관한 다른 호칭 중 하나이며, ‘농업(백정)’은 농업에 종사하는 백정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에도 호적에 붉은 글자로 ‘도한(屠漢)’이라고 표시하였으며, 보통학교 입학원서에도 그들의 신분을 써넣게 하였다. 이처럼 백정에 대한 신분 차별은 갑오개혁 이후에도 관공서에서조차 계속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인들 또한 일상생활에서 호칭을 비롯하여 백정을 차별하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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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군 도한(屠汗) 무술(戊戌) 호적표>(좌)와 내용 중 ‘직업 도한(屠汗)’ 부분(우)_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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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고성 백정 가옥과 가죽을 다듬는 작업 모습(1914)_국립중앙도서관 소장(좌),「형평사 발기회」, 『동아일보』(1923.3.28.)(우)

백정들이 겪는 차별 문제는 경제활동에서도 발생하였다. 소·돼지·닭 등으로 생산하는 다양한 축산 식품, 구두·가방 등 가죽으로 만드는 온갖 장신구들은 모두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선호도가 매우 높은 식품 또는 장신구에 해당한다. 경제적으로도 그만큼 비싼 가격의 식료품이며 몸치장 용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수백 년 동안 백정들만이 하던 일, 즉 ‘도축업과 관련(이하 도축 관련업)’이 있다. 일반인들은 백정의 신분을 천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직업인 도축 관련업도 천하게 여기고 꺼렸었다. 그 때문에 도축 관련업은 백정들만의 '세전업(世傳業)', 즉 '대를 이은 전문적인 직업'이었다. 그들은 소나 돼지 등을 도축하고 해체하였으며, 고기를 판매하거나 가죽 제품을 만들고 파는 일 등 도축에서 판매까지 모든 과정의 일을 하였다.1876년 개항 이후 외국으로부터 근대적 또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일반인들도 도축 관련업이 지닌 경제적 가치를 인식하고 그 일에 참여하게 된다. 또한 조선에 사는 재조선 일본인(이하 일본인)과 거류민단·학교조합 등 일본인 단체도 도축장을 경영하는 등 도축 관련업에 종사하였다. 심지어 일반인과 일본인이 연합하여 수육판매조합을 조직하는 등 백정들의 경제활동과 경쟁하거나 그들을 위협하였다. 백정들이 부당하게 겪는 경제적 가해 또는 침해 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할 때면, 일반인들은 “감히 천한 백정들이 대든다.”라고 하며 신분적 모욕을 주며 반박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변화 속에서 사람들이 편의에 따라 취했던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까지 도축 관련업에 대해서는 경제적 가치를 인식하고 종사하려고 하면서도, 백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차별하며 천하게 여겼다.

일제강점기에 백정들이 당한 차별이나 모욕은 사실상 그 이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식민자인 일제 또는 일본인까지 가세함으로써 ‘신분적 차별’과 ‘경제적 침탈’이라는 중첩된 피해를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학교 입학 거절 등 자녀들의 교육 문제가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1923년 4월 인권 평등과 회복을 부르짖으며 형평사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자녀 교육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가장 주요한 과제이다. 백정들도 자녀들에 대한 교육적 차별 문제는 절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음은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형평사를 창립할 때 발기인 일동이 발표한 <형평사 주지(衡平社 主旨)> 내용이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오,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 

그러므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사람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의 주지니라. 

금(今) 아(我) 우리 조선의 백정은 여하(如何)한 지위와 여하한 압박에 처(處)하였는가? 

과거 회상하면 종일 통곡의 혈루(血淚)를 금할 길 없어 이에 지위와 조건 문제 등을 제기할 여가도 없이 목전의 압박을 절규함이 우리의 실정이라, 

이 문제를 선결(先決)함이 우리의 급무로 인정할 것은 적확(的確)한지라. 

비(卑)하며, 빈(貧)하며, 열(劣)하며, 약(弱)하며, 천(賤)하며, 굴(屈)하는 자 누구인가? 희(噫)라! 우리 백정이 아닌가? 

그런데 여차한 비극에 대하여 사회의 태도는 여하한가? 소위 지식계급에서 압박과 멸시만 하였도다. 이 사회에서 백정의 연혁을 아는가? 모르는가? 

결코 천대받을 우리가 아닌가 하노라. 직업에 차별이 있다 하면 금수의 목숨을 뺏는 자가 우리뿐이 아닌가 하노라. 

본사(本社)는 시대의 요구보다 사회의 실정에 응하여 창립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도 조선 민족 이천만의 분자(分子)이며 

갑오년 유월부터 칙령으로 백정의 칭호를 없이하고 평민된 우리이라.

 애정으로써 상호부조하여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며 공동의 존영(尊榮)을 기하고자 자(玆)에 사십만이 단결하여 본사의 목적된 바 그 주지를 선명히 표방하고자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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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형평사 기념일 행사 관련 기사, 「최대 원한이 차별」, 『동아일보』 (1925.4.26.)(우)

형평운동은 ‘백정’들만 참여했는가

형평사에서 규정한 형평사원의 자격은 “조선인은 하인(何人)을 불문(不問)한다.”였다. 형평운동의 목적인 ‘계급 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 장려, 상호 친목’ 등에 뜻을 같이하는 조선인이면 누구든지 함께할 수 있었다. 형평사 창립 준비 때부터 백정들뿐만 아니라 백정 출신이 아닌 지역의 사회운동가 또는 지식인들도 형평운동을 사회개혁 운동 중의 하나로 중요하게 인식하고 적극 참여·협조했다. 1923년 4월25일 발기총회부터는 형평사의 공식적인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강상호·신현수·천석구 등은 백정 마을 사람들이 모욕적인 삶을 한탄하며 "우리 아이들은 ‘백정’으로 천대받게 할 수 없다.”라고 애절하게 호소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하여 차별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형평사를 창립하는 데 백정들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강상호와 이동구는 독립유공자이다. 강상호는 진주의 3·1운동을 주도하여 징역을 살았으며, 이동구는 1926년 만주 지린(吉林)에서 고려혁명당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4년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의 사회운동가들이 형평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최근까지 진주에서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하던 김장하는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형평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확산하는 데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사회운동가들이 형평운동에 참여하면서 협력·지원했던 정신을 오늘날에도 잘 계승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2023년 1월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를 인터뷰한 『한겨레신문』에서는 “되짚어보면 지난 세월 형평운동은 한약업사 김장하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김장하는 ‘새로운 차별’에 맞서 수많은 사람을 키워냈고 골고루 건강한 지역사회 건설을 위해 구석구석 씨앗을 심고 물을 길어왔다. 없는 이에게 기회를 줬고 소외된 곳과 아낌없이 연대했다. ‘김장하식’ 차별 철폐였고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라고 보도하였다.

사회운동가 중에서 신문사나 잡지사 등 지역과 중앙의 언론계에 있으면서 형평운동에 참여한 활동도 매우 중요하였다. 진주의 강상호·신현수, 마산의 여해(呂海), 예산의 김성준(金成俊), 이리(현 익산)의 조정희(趙正熙), 천안 입장의 박호군(朴好君), 정읍의 최중진(崔重珍), 천안의 김현덕(金顯悳), 홍성의 이한용(李漢容)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들은 형평사 관련 내용을 신문이나 잡지 등 언론을 통해 보도·게재함으로써 형평운동을 전국적으로 빨리 알리고 확산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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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는 어떤 활동을 했는가 

첫째, 차별철폐 활동이다. 옛 백정들 또는 형평사원들은 관공서뿐만 아니라 경제·교육·사회 등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난 차별사건, 반형평운동 등에 저항하며, 인권 회복·인권 평등을 위한 반차별운동을 펼쳤다. 둘째, 경제 활동이다. 그들의 오랜 종사업에 관하여 일반 조선인과 일제 또는 재조선 일본인으로부터 경영권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도수장 및 피혁 건조장 운영, 형평사원 생산품 공동판매, 피혁회사 등 각종 회사설립, 산업별 조합조직, 대외무역 참여 등과 같이 그들의 오랜 전통적 사업을 근대적 사업으로 발전시키려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셋째, 교육 활동이다. 교육 대상은 아이들·청년·여성 등 다양했으며, 야학·강습소·복습회 등을 운영하거나 순회 강연·사원 훈련 등을 실시하였다. 특히 형평사원 자녀들에게는 자체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한 교육 실시, 학비 보조, 외국 유학 등 최대한의 교육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형평사원들에게는 문맹 퇴치를 비롯한 각종 교양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형평사원이 아닌 가난한 일반인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도 적극 관심을 두고 활동하였다.넷째, 형평사원 복지·후원 활동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원들을 돕거나 형평운동 과정에서 경제적 신체적 피해를 보아 생활이 곤란한 사원 가족을 후원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회 운동이나 단체와 연대한 사회적 활동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이 처했던 민족적·사회적·시대적인 다양한 문제 또는 과제와 관련하여 노동·농민·사상·소년·여성·종교·청년·학생운동 등 많은 분야의 사회운동이나 단체들과 교섭·연대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기회주의 및 파벌주의 등 사회의 부정적인 면에 대한 배척 운동, 재만 동포구제(구호) 활동 등 해외 동포 관련 활동, 금주운동, 각종 사상운동, 그리고 일본 수평사(水平社)와 교섭 등이 있다.


독립운동과 형평운동과의 관계

형평운동이 목표했던 ‘신분 또는 차별로부터의 해방’, ‘참사람이 되는 것’ 등이 지닌 정신적 사상적 성격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독립운동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당시 조선 또는 조선인의 목표가 ‘일제에 의한 피지배라는 상황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즉 ‘일제로부터의 해방운동’이었기 때문이다. 형평운동과 독립운동은 ‘누구 또는 무엇으로부터 해방하느냐’하는 그 대상에서 차별성이 있을 뿐이었다. 독립운동의 대상은 일제와 일본인이었으며 형평운동은 그에 더하여 백정을 차별하던 조선인 일반인이었다. 형평운동 초기부터 신문 등에서는 형평운동이 지닌 해방운동의 성격이 민족적 해방운동과 관련이 있다거나 연장선에 있다는 것 등을 보도하였다. 다음은 그와 관련한 『동아일보』기사 또는 사설 사례들이다.


1. ··· 형평사 운동이 단순한 그 계급에만 그 효력이 정한(定限)될 것이 아니라. 기력이 쇠퇴(衰退)해가는 조선인 전부의 해방운동에 일대(一大) 경종··· 

2. ··· 시대적 요구에 응하여 형평사 운동의 발전을 보고 해방운동의 발전으로 그 가치를 시인하고 ··· 

3. ··· 소작인의 해방, 부인의 해방과 같이 백정의 해방도 민족의 해방운동에 한가지 길이다.

4. ···요(要)컨대 문제는 대국(大局)으로 보아서, 조선인 전체가 형평사원과 같은 운명을 가진 것을 자각치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형평운동은 어느 의미로 보아서 조선인해방운동의 전위(前衛)가 될 것이다.


형평운동을 조선 민족해방운동의 상징적인 모델 중 하나로 여기고, 그러한 인식을 조선 사회에 확산시키려고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네 번째 사설은 일제에 압수되었다. 형평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상징적 관계를 매우 간결하고도 분명하게 서술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형평사 일부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고려혁명당이나 신간회 등 독립운동 단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정당이며, 신간회는 1927년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창립한 민족협동전선으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932년 말부터 전국에서 100여 명의 형평 운동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하였다. 이 사건은 1933년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으로 보도되었다. 일제는 형평 청년들이 형평운동의 해소를 부르짖고 적화운동을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했다고 하였다. 피 검거자 중 서광훈 등 13명은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되었다. 형평청년전위동맹이라는 단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형평사원 중 주요 인물들이 장기간 검거·투옥됨으로써, 형평운동은 1931년 형평사의 해소 논쟁에 이어 커다란 타격을 받아 크게 위축되었다. 1935년 4월 제13회 전국대회에서 형평사 이름은 대동사(大同社)로 바뀌었다. 형평운동을 시작할 때의 인권해방이라는 목표도 퇴색하였다. 단지 백정 계급의 경제적 이익단체로 변하였으며, 일제의 파쇼적인 정책과 맞물려 그에 영합하고 융화하는 단체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오늘날까지도 ‘형평운동’은 계속되고…

1923년의 <형평사 주지>에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 ‘계급을 타파’, ‘평민된 우리’라는 내용이 있다. 사회의 근본은 공평하며, 형평사의 목적은 백정에 대한 계급적 차별을 타파하여 다른 국민과 동등한 평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대한민국헌법> 전문을 보면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라고 되어 있다. 또한 2001년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법> 제1조에서 설립 목적이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이라고 하였다. <형평사 주지>에서 밝혔던 공평, 계급 타파, ‘백정도 일반 평민과 같은 존재 즉 다른 평민과 동등함’ 등이 오늘날의 <대한민국헌법>과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도 각 ‘개인’의 균등, 사회적 폐습과 불의 타파,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 보호 등의 정신으로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 <조선형평사 제8회 정기대회> 포스터에는 형평 즉 균형을 상징하는 저울을 팔로 치켜세워 들고 있는 그림이 있다. 현재 대법원을 상징하는 로고와 대법원 건물 출입문 위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에서도 형평사 포스터와 비슷한 모습으로 저울을 들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 법원으로서 형평성 즉 형평 정신이 가장 중요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처럼 형평운동이 지닌 정신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가장 주요한 삶의 기본 바탕이 되고 있다.


“도심에 내건 현수막, 일반은 ‘불법’ 정치인은 ‘합법’ 형평성 논란”, 

 “공정과 형평, 가치 중심으로 시정 운영”, 

 “유치원·어린이집 교육비 지원 형평성 논란” ….


최근 신문 기사의 제목이나 내용에서 ‘형평’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사례들이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형평성이 깨지면 불만이나 불평 제기, 시위·분쟁·재판 등 다양한 형태로 형평을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한 활동, 즉 ‘형평운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그러한 양상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민주주의가 발달한 사회일수록 더 발생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도 형평성의 균열이 너무 심할 때는 마찬가지로 전개된다. 한국 역사상 그와 같이 중요한 ‘형평’ 정신을 목적으로 조직까지 만들어 운동을 벌인 것은 형평사와 형평운동이 맨 처음이고 유일하다. 그것도 수백 년 동안 가장 천대받던, 가장 낮은 자들에 해당하였던 백정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처럼 매 순간 우리 사회는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공정과 형평’을 주장하고 형평을 중요시하면서도 형평이라는 단어에 운동을 합성한 ‘형평운동’이라고 하는 용어에는 매우 낯설어한다. ‘형평사’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적 국가적인 위기의 상황 속에서 게다가 가장 소외된 위치에서 차별까지 받고 살던 옛 백정들은 형평사를 조직하여 인권 평등을 주장하고 실천하기 위해 형평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백정 출신이 아닌 사회운동가들도 그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형평운동 출발 100주년을 맞아 그러한 선각자들께 커다란 존경의 마음을 전하며, 우리 역사의 훌륭한 본보기로 더 널리 알려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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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 제8회 정기대회 포스터(좌), 대법원 출입문 위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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