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독립기념관 4월호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3·1운동의 경험으로
학생운동의 주도자로 성장한

박하균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처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박하균(朴河均)

본적 및 주소 : 함경남도 홍원군 보청면 신평리 23

생몰 : 1902. 10. 26. ~ 미상

이명 : 박하균(朴河鈞), 박하구(朴河鉤), 박하조(朴河釣)

포상추천 : 2019년

포상 : 2020년 광복절 계기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운동

방면 : 3·1운동, 국내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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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균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1919)3·1운동으로 일제에 피체되었을 때의 사진

1919년 3월 함흥의 만세시위 물결, 거기에 그가 있었다

1919년 3월 3일 함경도 제일의 도시 함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기운은 심상치 않았다. 대도시인 만큼 만세시위는 농민과 학생·종교인 등 1,000여 명의 군중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였고, 그 양상 또한 격렬했다. 기독교 전도사 조영신은 순사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계속 만세를 부르다가 입이 찢겨졌고, 흰 머리가 성성한 농민 이명봉은 집 옥상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바로 그 현장에는 겨우 17세 소년, 박하균도 있었다. 

박하균은 고향 홍원을 떠나 함흥으로 와서 기독교 계열 사립학교인 영생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던 학생이었다. 그는 고향 사람이자 학교 선배인 곽선죽의 권유로 동료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부상자가 나왔고, 수백 명이 검거되면서 끝이 났다. 당시 박하균은 단순참가자로 분류되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교직원과 학생 대부분이 검거된 영생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고, 박하균은 홍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위협적인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우리의 목적을 중지시킬 수 없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함흥에서 겪은 만세시위 경험은 박하균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홍원에서도 만세시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중심지에서 다소 먼 곳에 있던 고향 보청면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 그는 이 ‘평화로움’을 깨뜨리고자 결심하고 함흥에서 읽었던 독립선언서를 떠올리며 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글을 작성하고 장터 곳곳에 붙였다. 이어 4월 8일 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경찰관 주재소,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 앞으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박하균은 시위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8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 4월 11일 출옥하였는데, 그의 상고 취의는 17세 소년의 발언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당당했다.


“아무리 위협적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우리의 목적을 중지시킬 수 없다. 고통을 받는 만큼 우리 민족은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정의의 뜨거운 피가 솟구칠 것이다. 

(중략) 자유, 평등, 인애(仁愛)를 무시한 일본제국정부여. 우리 민족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려면 먼저 자유와 평등사상을 유죄로 벌하라. 

삼천리강산을 식민지로 만들려면 그 주인인 2천만 생령(生靈)을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멸살하라.”


출옥 후 함흥 영생학교로 돌아온 박하균은 함흥기독청년회에 가입하는 한편,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함경남도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 1925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활동과 6·10만세운동

3·1운동 이후 민족적 과제는 민족운동을 스스로 전개, 발전시키기 위한 힘을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3·1운동 과정에서 전위적 역할을 담당한 학생계층은 교육, 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높이는 한편, 스스로를 운동의 주체로 인식하고 다양한 학생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1925년 설립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는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이 중심이 되었는데, 박하균은 1926년 4월 제1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학생도서관 설립 운동, 과학문제 강연회와 강좌 개최, 지방 하기대학과 농촌강좌 설치 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지성계를 풍미하던 사회주의 사상을 통해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흐름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1926년 4월 26일 세검정으로 야유회를 가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순종의 승하 소식을 접하였다. 이들은 고종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났던 3·1운동을 떠올리고, 순종의 인산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고자 계획하였다. 5월 20일 서울지역 각 학교 학생대표들이 모여 거사 방법, 자금 조달 등에 대해 협의하였고, 박하균은 준비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거사는 조선공산당 학생부 소속이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주요 간부 이병립을 통해 조선공산당의 지침을 전달 받는 방식으로 구체화 되었다. 그러나 거사를 앞둔 6월 6일 조선공산당 지도부가 일제에 체포되면서 결국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박하균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은 서대문 밖 소나무 숲에서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제작하는 한편, 명함 인쇄기를 구하여 격문 수만 장을 인쇄하였다. 그리고 각 학교별로 시위 구역을 분담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배부하는 등 모든 시위 준비를 마쳤다. 6월 10일 오전 8시 순종의 어가행렬이 창덕궁을 출발하여 관수동을 지날 무렵, 수표교 부근에서 박하균이 격문을 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인근에 모여 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이 호응하였고, 뒤이어 중앙고보, 기독교청년학관 학생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날 서울 시내 8개소에서 대거 천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때의 만세시위를 우리는 6·10만세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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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균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1927.4.2.)6·10만세운동으로 검거되었을 때의 사진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학생운동의 주도자 박하균

만세시위에 참가한 사람 중에서 모두 53명이 검거되었다. 이 중에서 주도자 11명 중 10명은 1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박하균은 유일하게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박하균을 제외한 피고들은 전과가 없고 대부분 학생이므로 형 집행을 유예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그가 1919년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당시 ‘보안법’ 위반 전과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겠으나 이번 거사에서 그가 그만큼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박하균은 함흥형무소에서 1년의 옥고를 치르고 1927년 9월 20일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와 홍원청년동맹, 홍원학우회 등 청년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던 박하균은 1932년 5월 서울 송현동에서 신흥서점을 운영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죄명은 출판법 위반. 총독부에서 발매 금지 처분을 내린 서적을 판매하여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해쳤다.”라는 이유였다. 이로 인해 박하균은 금고 5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세 번째 옥고를 치르고 1932년 10월 3일 출옥하였다. 1919년 함흥 만세시위 단순 참가자에서 그치지 않고, 지방 만세시위의 주도자로 활약하였으며, 다시 저항적 민족운동의 중심인 학생조직의 간부이자 1926년 6·10만세시위의 중심인물로 성장한 박하균. 1920년대 민족운동의 현장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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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1월 2일 6·10만세사건 1심 공판 광경, 『동아일보』 (192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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