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개신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남녀평등·자유·권리 등의 소중함을 일찍 깨우친 차경신은 교사로서 여성과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들의 권익옹호를 도모하던 박재형과 1924년 부부의 연을 맺은 그는 조국광복의 날까지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조달과 여성교육 등에 큰 몫을 담당했다.

박재형과 차경신(1920년대 후반, LA)
차경신, 교사로서 여성의 자존감을 일깨우다
차경신은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에서 1892년 2월 4일에 태어났다. 미곡상을 하던 아버지 차기원과 어머니 박신원 사이에 여섯 딸 중 맏딸이었다. 본관은 연안인데, 이곳은 일찍부터 개신교가 전래되어 활동이 가장 왕성하던 지역이었다. 당시 부계혈통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아들을 낳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정신적 고통을 받던 중 남녀평등관에 심취하여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 개신교에 입교한 후 전통적인 여성관에서 벗어나 남녀평등·자유와 권리의 소중함을 인식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차경신은 16세에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푸트(W. R. Foote, 富斗一) 등이 설립한 보성여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 성경·한문·역사·지리·과학·윤리·산술 등 다양한 교과목을 접하며, 시세 변화에 부응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순간을 맞았다. 또한 이곳에서 강기일·오순애·김신의·김성무 등과 인연을 맺었고, 이들은 훗날 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가 되었다. 졸업 후 강계 명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이 학교는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그는 4년간의 교사생활을 청산한 후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서울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 식민지배라는 현실에 절감하여 민족문제를 고민하였다. 또한 기숙사의 엄격한 공동체 생활은 여학생들에게 여성과 민족에 대한 의식을 싹트게 하였다. 졸업 후 함흥 영생여학교와 원산 진성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주체적인 여성의식과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젊은 시절 차경신
김마리아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다
1918년 배움의 갈증을 풀기 위해 일본 요코하마여자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이 시기 인생 항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김마리아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한국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마침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학우회 총회를 구실로 2·8독립선언을 결행했다. 김마리아는 그를 찾아와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반입할 계획을 논의했다. 김마리아는 도쿄유학생 대표로, 차경신은 요코하마유학생 대표로 각각 귀국을 결정하였다. 이들은 일본 옷띠인 오비 속에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숨기고 귀국길에 올랐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에도 ‘아버지 사망’을 구실로 내세우는 지혜를 발휘하여 무사히 국내에 돌아왔다.
이들은 신한청년단 서병호와 김순애 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위한 여성단체 조직을 논의하였다. 차경신은 이들을 통해 독립운동 주역들과 교류할 수 있는 인적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어 서울에서 정신여학교장 루이스와 함태영 등도 만났고, 평양에서 김경희를 만나 만세운동 전반을 논의한 후 고향 선천으로 내려갔다. 그는 신한청년당 당원 50여 명을 규합하는 동시에 신성학교·보성여학교 교사와 읍내교회 지도자 등을 만나 향후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위해 부인회와 청년단도 조직하였다.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한 선천3·1운동을 주도하여 여성들의 ‘자기존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어머니와 보성여학교 동기생 강기일·김강석·오순애 등의 참여로 그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한 지원군을 얻게 되었다. 이후 부상자 돌봄과 구속된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에도 매달렸다.

차경신이 작성한 대한여자애국단의 재정과 사업내역 문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금 조달에 힘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마리아와 함께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이를 통해 모금한 독립운동자금은 임시정부에 보내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총무 겸 재무 역할에도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연락망 구축은 열의와 달리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국광복’ 대변자처럼 묵묵히 앞장선 그는 동생 차경순의 남편 선우혁이 교통차장인 점을 빌려 자금모금과 연락망을 구축해 나갔다. 또한 3·1운동 1주년쯤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시위에도 참여해 이들을 격려했다.
차경신은 일제 감시와 탄압으로 대한청년단연합회 활동이 어렵게 되자 8월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임시정부의 비밀요원으로서 특히 안창호를 도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열성적이었다. 한편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으로 복역 후 병보석으로 풀려난 김마리아가 상하이로 망명하자, 그와 함께 면려청년회를 조직하는 등 신앙을 통해 교민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향촌부인회 등을 통하여 국내 항일여성단체와 연락망을 구축하여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발판을 만들었다. 회원은 각기 4원의 회비를 납부하여 그중 1원은 향촌부인회 비용으로, 나머지는 임시정부에 보냈다. 차경신은 자금조달의 일익을 담당하다가 1921년 몸이 쇠약해져 홍십자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다.

왼쪽부터 김마리아, 안창호, 차경신(1924년경)
미주 한인사회에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다
1924년 1월 김마리아 권유로 미국으로 건너간 차경신은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와 교회주일학교 교사를 맡았다. 대한여자애국단이 개최한 환영회장에서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 등에 대해 연설했다. 그의 열성적인 활동은 한인사회 여성지도자로서 면모를 일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대한여자애국단 단장으로 활약하면서 특히 민족의식을 강조했다. 또한 흥사단에 입단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독립운동 지원을 계속하였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 국어학교를 설립하여 초대교장으로 교포 자녀들의 한글교육에 힘썼다. 이는 한국인으로서 민족정체성을 고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1931년 로스앤젤레스 국어학교 교장직을 사면하고, 샌프란시스코 대한애국부인회 총본부를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1933년부터 7년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지회 확대에 노력하였다. 그는 ‘애국단에 대한 감상과 희망’이라는 연설을 통해 여성들의 적극적인 항일투쟁 참여를 강조했다. 또한 임시정부·독립신문사·광복위로금·구미위원부 군축선전비 지원 등 독립운동에 열성을 쏟았다. 만주동포구제금·국내 수재의연금·고아원 지원 등 구호사업을 위해 힘썼다. 한편, 그는 평생 관절염과 신경통에 시달렸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여성도 스스로 삶의 주체이며 인격체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여성의 정치의식과 자유민주주의 의식 고양에 온 정성과 힘을 다했다.
광복 후에도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재무위원과 로스엔젤레스지부 서기를 맡아 활발히 활동하였다. 1960년 자유당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기 위한 민주정권수립촉구 민중대회에 이화목·임메불·강영복 등과 함께 대한여자애국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1978년 9월 28일 차경신은 ‘보성여학교에 장학금 5천 달러를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재형, 한인사회 권익옹호와 단결에 앞장서다
박재형은 평안남도 증산군에서 1889년경에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한 후 1905년 5월 고향을 떠나 하와이에 이민하였다. 이후 미주 본토로 생활근거지를 옮겨 1910년 11월 30일 시카고에서 대한인국민회 산하 지방회가 설립되자 가입·활동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듬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광복 때까지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이하 지방회)에서 활동하였다. 지방회에서 평의원과 서기 겸 대의원, 로스앤젤레스 한인학생기숙소 발기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법무 겸 자치규정수정위원 등을 맡았다. 이를 통하여 한인사회 권익옹호와 단결을 도모하는 데 앞장섰다.이후 지방회 부회장 겸 재무로 선임되자 지방총회 법무를 사임하였다. 이어 지방회 총무 겸 학무·재무와 법무위원·총무 겸 서기를 역임하며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인사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3·1운동 이후 임원 총사퇴로 임원을 재선정할 때는 학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국민회 산하 로스앤젤레스 파출소 위원, 국내 한인 구제를 위한 구제금 모집 지방위원, 구미위원부 로스앤젤레스 지방위원으로 활약했다. 또한 중국 동북지역 동포들의 참상에 구휼금을 보내는 등 한인사회와 소통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1924년 11월 황성택 등 5인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국어학교 설립을 위한 실행위원과 교섭위원을 맡았다. 이듬해 로스앤젤레스 조국동포 기근구제회 재무로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지방회 재무·구제원·나성국어학교 교육위원·한인아동교육기관 기성 발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안창호의 소개로 차경신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는 독립운동으로 몸이 쇠약해진 부인을 회피하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돌보았다.
1930년 지방회 회장에 취임한 박재형은 광주학생운동 후원을 위해 로스앤젤레스한인공동회를 조직하고 재무위원이 되어 후원금을 모집하였다. 이어 1932년 상해사변 임시위원부 수전위원,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특연을 위한 청연위원, 1936년 재미한인사회 발전책 실행위원, 1943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 등을 지냈다. 그의 다양한 활동은 미주 한인사회의 대동단결을 도모하는 밑거름이었다. 박재형은 1967년 7월 운명하였고,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