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정인(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오늘날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어나고는 있지만, 항일 전선에 직접 나서서 싸웠던 여성들의 활동은 아직 발굴조차 되지 못한 것들이 많다. 전시 현장 한가운데에서 목숨을 던지며 투쟁했던 여성 독립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확인해본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서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오광심, 조순옥, 지복영, 김정숙(1940.9.17.)
독립군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주체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조선총독부가 들어섬과 동시에 사실상 독립을 목표로 한 무장투쟁, 즉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독립전쟁의 공간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확장되었다. 1910년 당시에는 의병이 무장투쟁을 이끌었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이 가까이 올 무렵에는 한국광복군·조선의용군·동북항일연군 등 체계적인 군사조직을 갖춘 무장세력들이 국외에서 독립전쟁을 벌였다. 독립전쟁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국내 곳곳에서 산재해 싸운 의병에 이어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며 국내진공작전을 펼친 만주의 독립군 부대, 그리고 중국의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정부와 연대해 독자적인 군사 조직을 꾸리기까지 진화를 거듭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바로 그 독립전쟁의 주역을 우리는 독립군이라 부른다.
일제시기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기 발로 독립군 부대를 찾아갔다. 그런데 우리가 독립군, 즉 총을 든 전사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단연 남성이다. 독립군만이 아니라 독립운동 주체의 이미지 역시 남성이 독점하고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에서의 일이다. 그럼에도 여성 독립운동가로 호명되지만, 분명 존재했던 ‘여성’ 독립군을 독립군이라 호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근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했던 여성 독립군에 대한 연구가 그래도 활발한 편인데, 이 연구들에서 빠지지 않고 강조하는 것은 가족관계다. 대부분 독립운동 지도자의 가족이라는 것이다. 당시 여성의 현실적 조건을 볼 때 누구의 딸, 누구의 부인이라는 것이 독립전쟁에 투신한 중요한 배경일 수는 있다. 문제는 이처럼 여성 독립군에 접근할 때 남성 독립군과 달리 그의 활약 자체보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배경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반면, 여성 독립군의 독립군 조직 안에서의 삶과 활약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도된 인식을 벗어나 여성으로서의 독립군이 아니라 독립군으로서의 여성이라는 관점에서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한 여성 광복군, 조선의용대·군에서 활약한 여성 의용대원·군, 만주 유격대에서 활약한 여성 유격대원의 궤적을 좇아가보자. 그들은 여성 ‘독립군’이었다.
여성 광복군의 선전과 초모 활동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한국광복군(이하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1945년 4월 임시정부 군무부장의 보고에 의하면 총사령부와 3개 지대를 포함해 광복군 총수는 339명이었다. 해방 무렵에는 7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현재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여성 광복군은 31명이다. 여성 광복군 김효숙의 증언에 따르면, 각 지대 별로 30여 명의 여성 광복군이 있었다고 한다.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여성 광복군 오광심·지복영·조순옥 등은 선전조에 속해 활동했다. 선전조는 주로 한국어·일본어·중국어로 된 전단과 벽보를 작성해 살포하는 활동을 벌였다. 또한 한국어와 중국어로 기관지인 『광복(光復)』을 발행했다. 지복영은 한글 원고 정리를, 오광심과 조순옥은 발송을 맡았다. 광복군이 심리작전연구실을 설치하고 대적(對敵) 라디오 방송을 할 때도 여성 광복군인 김정숙·엄기선·연미당·민영주·지복영 등이 참여해 활약했다. 그들은 일본군에 편성된 한인 청년들에게 염전사상(전쟁의 장기화로 대중들이 전쟁에 대한 피로감과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을 느끼는 현상)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방송을 보냈다.광복군이 병력 확보를 위해 벌인 초모(의병이나 군대에 지망하는 사람을 모집함) 활동에서도 여성 광복군이 활약했다. 오광심·지복영·오희영은 함께 최전선에서 사기 저하를 목적으로 일본군 진영에 전단지를 투하하고 방송으로 일본군에 편성된 한인 청년들의 탈출을 독려하는 활동을 했다. 또한 일본군 포로의 심문 과정에서 정보를 수집해 미군에게 폭격지점을 알려주기도 했다. 나아가 일본군 점령지역으로 들어가서 한인들을 포섭함으로써 광복군의 자원으로 편입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광복군의 지하 거점을 구축했다. 국내로 잠입해서 광복군의 향후 활동을 위한 국내 거점을 마련하는 일도 했다. 1944년 시저우에서 탈출한 학병인 장준하와 김준엽을 충칭까지 인솔한 사람이 바로 오희영이었다. 백옥순은 광복군 제2지대 소속으로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금하고 독립운동가들과 접선했다.

오광심(좌) / 지복영(우)
여성 의용대·군의 무장선전활동
1938월 10월 10일 무한에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이하 의용대)가 창립했다. 의용대원들은 중일전쟁의 최전방에 진출해 선전전을 감행했다. 1939년 의용대는 부녀복무단을 창설했다. 부녀복무단 단장은 박차정이, 부단장은 장수연이 맡았다. 1940년 2월에 작성된 조선의용대 편성에 따르면, 부녀복무단원은 박차정 단장을 포함해 장수연·이화림·한태은·김위·전월순 등 2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0년 의용대원 다수가 충칭으로 이동하려는 김원봉과 갈라서며 타이항산으로 향할 때 당시 부녀복무단 부단장을 맡고 있던 이화림도 동참했다. 타이항산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결성될 때, 이화림을 비롯해 문정원·장수연·조명숙·권혁 등이 여성 의용대원으로 활약했다. 이들은 화북지대가 적극적인 무장선전활동을 벌이자 이에 가담했다. 이화림의 경우 왕자인이 이끄는 부대에 속해 무장선전활동을 펼쳤다. 화북지대는 일본군의 통신선과 교통로를 파괴하는 활동을 하며, 전단을 살포하거나 함화선전을 펼쳤다. 함화란 큰 목소리로 적군을 설득하는 선전활동을 말한다. 이화림이 속한 화북지대 제3대도 일본군에 대한 함화를 전개했다. 이에 대해 일본군은 기관총 사격으로 응수했다고 한다. 화북지대는 무장선전 활동만이 아니라 일본군과 직접 1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왕자인이 이끄는 무장선전대원으로서 이화림은 읍성전투가 벌어진 현장에 있었다. 1942년 화북지대가 무정을 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될 때, 이화림은 부녀국 대장으로 활동하면서 무장선전활동을 이어 나갔다.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1938.10.10, 중국 한구)(좌) / 박차정(우)
여성 유격대원의 최전선 전투 활동
1930년대 이후 중국과 일본 간의 최대 격전지는 만주였다. 만주 한인들은 중국인과의 적극적인 연대하에 항일전쟁에 함께 뛰어들었다. 여성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항일유격전이 한창이던 1933년 화룡·연길·왕청·훈춘 4개 현에서 무장투쟁에 뛰어든 적위대와 별동대의 여성은 343명이었다. 유격대원 420명 가운데 여성대원은 69명에 달했다. 그런데 『연변 인민의 항일투쟁』에는 무장투쟁으로 희생한 이들의 명단이 나온다. 성별로 보면 남성이 1,096명, 여자가 138명이다. 여성이 전체의 11%가량을 차지한다.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군으로 싸운 여성들과 달리, 총을 들고 직접 유격전에 참여한 숫자가 많았던 만큼 희생이 컸다.
여장군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경희는 18세가 되던 해인 1932년 돌격대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고 이듬해부터 소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했다. 1933년부터는 용정유격대 소속으로 일본 경찰관서를 습격하거나 전투에 기습조로 투입되어 활동했다. 1934년에는 다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 속해 노도구 전투, 처장즈 전투 등에 참가했다. 1935년 안두현에서 일본군의 군용열차를 습격할 때는 습격조에 참가해 명사수로 이름을 날리고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공을 세웠다. 1936년부터는 장백현을 넘어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던 중 이듬해에 일본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