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재일 유학생을 결집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한 이옥·유원우

이달의 독립운동가<BR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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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지광』 12호 (1917) 1914년 4월에 창간되어 문예·학술·교육·사회·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실었다.(좌) /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육상운동회 (1917.4.8.)(우)


재일 한인의 구심점,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일제강점기 고등교육의 기회가 흔치 않았던 한국인들은 배움에 대한 열망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가 1895년에 설립된 이후 다양한 유학생 단체가 생겨났으나 1910년 강제병합에 저항하며 다수의 유학생이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활동이 정체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12년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가 출신지방별 유학생 친목회의 연합체로 설립되어 동경 지역 유학생을 망라하는 대표조직으로 성장하였다. 기관지 『학지광(學之光)』 발행 및 운동회·강연회·웅변회 개최 등의 활동을 통해 재일 한인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었으며, 특히 1919년에는 2·8독립선언을 주도해 3·1운동의 기폭제를 마련했다. 1931년 2월 스스로 해체를 선언할 때까지 유학생단체를 넘어 독립운동단체로서 일본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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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신간회 경성지회 발회식 (1927) / 「이옥씨 영면 삼십사세를 일기로」,『동아일보』 (1928.12.26.) / 

「재경조선인 상황」 (1924.5)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작성한 것으로 ‘사상노동운동’ 관련 주요인물로 이옥(학우회 조선노동동맹회 간부)이 언급되어  있다. 

이옥, 재일유학생 운동을 주도하다

이옥은 1895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이후 안동 지역의 유력가 및 학교·종교 등을 조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조사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 서무부장과 총무로 활동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유학생들의 피해상황을 조사·지원하기 위해 서울에 꾸려진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유학생 조직 재건을 위해 힘썼다. 일제는 동경 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인물 중 하나로 이옥을 지목, 요시찰인물 ‘을호’로 지정하여 감시와 경계를 계속하였다. 1924년 대학 졸업 후에는 국내로 돌아와 시대일보사 이사·신간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이옥의 공훈을 기려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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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동경지회 성명서」 (1928. 4. 11) 일제에 대항해 치안유지법 철폐,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등을 요구하는 성명서이다.(좌) / 

「협동조 강연 공주에서 성황」,『동아일보』 (1927.7.30.) 공주에서 개최된 협동조합운동사 강연에 대한 기사로, 

유원우는 ‘협동조합의 이론과 실제’라는 연설을 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우)

유원우, 재일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앞장서다

유원우는 1901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재학 중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 실행위원과 신간회 동경지회 초대총무간사로 선임되어 재일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동경 지역에는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를 비롯해 노동·청년·여성 등 다양한 분야의 한인단체가 있었는데, 이 단체들의 연합체로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가 탄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신간회 동경지회가 조직될 수 있었다. 1929년에는 학우회 대표로 피선되어 일본 전국에 신간회 조직을 확대하려다가 일제에 붙잡혔다. 한편 유원우는 농촌 지역의 개선을 위한 협동조합 설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6년 유학생들이 조직한 협동조합운동사의 재무부 위원을 맡았고, 협동조합의 내용을 알리는 국내 순회강연에 참여했다. 정부는 유원우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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