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정인(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여성 독립군은 누구도 성차별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 독립군은 그것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들의 긍지는 드높았다.

이화림
성차별을 딛고 전사로!
남녀 구분 없는 독립군 활동이 평등한 조직 문화 속에서 이루어졌을까. 의용대원으로 활약했던 김학철은 1994년에 한국에서 출판된 산문집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에서 여성 의용대원 이화림을 성차별적으로 대했던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한 바 있다. 김학철이 이화림을 처음 만난 것은 1936년 난징에서였다. 이화림은 자신을 “미세스 리”, “ 아주머니”, “누님”이라고 부르는 그에게 “화림 동무”라고 부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김학철은 여자를 동무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김학철이 “여자다운 맛”이 없다고 본 이화림을 다시 만난 것은 조선의용대원으로 활동할 때였다. 그런데 조선의용대원 일부가 뤄양으로 이동할 때 이화림이 동참하자 아무도 그녀를 환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화림은 남성 의용대원들의 빨래를 해주는 등 호의를 베풀고도 냉대를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김학철이 보기에 이화림은 이러한 성차별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성 의용대원들은 타이항산으로 이동하면서 이화림을 떨궈 놓고 갔다. 하지만 몇 달 후 이화림은 일본군의 봉쇄선을 뚫고 타이항산에 들어왔고 남성 동지들은 “저게 또 따라왔네?” 라고 하며 키득거렸다. 이화림에 대한 남성 동지들의 배격은 계속되었다. 다시 의용군을 편성할 때 이화림을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없어 그녀는 “개밥에 도토리 꼴”이 되고 말았다. 김학철은 이화림이 1944년 타이항산에서 옌안의 의학 전문학교로 가게 된 것도 일종의 배척을 당한 것으로 회상했다. 그리고 이화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화림은 일생을 두고 혁명에 충직하였다. 여성의 몸으로 수없이 많은 간난신고를 겪었고 또 그 간난신고를 하나하나 다 이겨내었다. 그녀는 쩍말없는 여전사였다. 정직하고 강의한 여류혁명가였다. 하건만 그녀의 사사로운 생활은 계속 고적하고 처량하기만 하였다. … 이화림은 동지들의 테두리 안에서 수십 년 동안 옳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 옳은 평가를 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는 - 유감천만하게 나 - 이 김학철도 들어있다.”
이처럼 이화림에 대한 배척은 비단 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독립전쟁에 뛰어든 여성이라면 이화림과 같은 성차별을 받으며 그것을 감내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여성 독립군이 일상에서 감내해야 했던 성차별은 역시 성역할에 따른 구별짓기였다. 만주에서 유격대에 들어간 여성 유격대원의 경우 자원하지 않으면 대부분 작식대와 재봉대에 배속되었다. 여기서 작식대란 때맞추어 군인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과 함께 식량이 없을 때 이를 구해야 하는 역할을 하는 조직을 가리킨다. 재봉대는 주로 군복 제조를 맡았다. 여장군이라 불리던 이경희도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작식대원을 도와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해야했다. 그는 군용열차 습격전에서 명사수로서 공을 세우고 표창을 받았지만, 군복을 동복으로 갈아입어야 할 10월에 되자 여성 대원들을 총 동원해 재봉하는 일에 나서야 했다. 여성 의용군을 이끌었던 이화림 역시 여성 의용군들과 식량 마련을 위해 매일 나물을 채취했다.

(왼쪽부터) 노년시절 이화림 / 부상을 입은 대원을 응급처치하는 이화림 / 왼쪽부터 여성 광복군 조순옥, 오광심, 지복영
여성 독립군으로서의 높은 긍지
이처럼 독립전쟁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군들은 성역할에 따른 구분 짓기를 일상으로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독립전쟁에 뛰어들었을까? 여성 의용대원 박차정은 1938년에 조선민족전선연맹 기관지인 『조선민족전선』을 통해 조국의 자유, 동아시아 평화, 인류 정의를 위한 독립전쟁, 즉 항일항전에 여성들이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제 중국의 전면적 항일전쟁이 시작된 이후 우리들은 1차적으로 중국의 항전이 중국 민족생존의 방위전임을 의식하고 또 이 전쟁은 동양 피압박 민족해방 전쟁이며 우리 조선 민족이 명료한 조국 자유를 취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지금 중국 동북에 거주하는 부녀 동포는 모두 중한 항일 연군에 참가하여 명료한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 혁명 부녀들은 일치단결하여 신성 위대한 민족 해방 전쟁에 참여하여 조국의 자유 투쟁을 위해 투쟁하며 동아 화평을 위해 싸우자. 나아가 인류 정의를 위해 싸우자.”
여성 광복군으로서 광복군 총사령부 선전조로 활약했던 지복영과 오광심은 광복군 기관지인 『광복(光復)』에 글을 남겼다. 지복영은 「한국여성동지들아 활약하자」라는 글에서 여성들이 한국인으로서 독립운동에 적극 뛰어들어 과거의 비인간적인 생활을 불살라 버릴 것을 호소했다.
“중화(中華)의 여아들도 이중삼중의 압박을 벗어나려고 날아드는 침략자의 총알을 두려워함이 없이 가슴을 내밀고 태항산 심곡을 황하 연안으로 대륙의 동서남북을 뛰어다니며 침략자를 향하여 (피)압박자를 향하여 고함치며 싸우고 있지 않는가. … 2천 3백만 민족의 반수를 차지한 여성동포들은 조국을 광복하고 신국가를 건설하는 데 차생역군인 것을 범한국사람은 다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중삼중의 압박에 눌리어 신음하던 자매들! 어서 빨리 일어나서 이 민족해방운동의 뜨거운 용로 속으로 뛰어오라 과거의 비인간적인 생활을 여기서 불살라 버리고 앞날의 참된 삶을 맞이하자.”
여성 광복군 오광심은 더욱 적극적으로 “총과 폭탄을 들고 전선에 뛰어 나갈 것”을 호소했다. 그것은 민족의 자유와 여성의 평등 그리고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함”이었다.
“우리가 남녀평등을 아무리 부르짖지만은 또는 여권을 찾아보자는 구호가 운소(雲?)에 높았지만, 원래 이런 혁명적 임무를 지지 못하면서 어찌 권리를 말할 수 있으리오. 평등과 권리를 찾으려면 먼저 자체의 분투와 능력이 있고 국가와 사회의 임무를 남자와 같이 부책하고야 될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의 부속물, 완농물, 기생충 등의 치욕되는 명사는 어느 남자가 준 것이 아니라 우리 여성들이 자취한 것이라 합니다. 동성동지들! 말로 평등과 권리를 부르짖지 말고 실제 노력과 행동을 함으로써 그를 쟁취합시다. …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이 위대한 광복군 사업에 용감히 참가합시다. 그리고 총과 폭탄을 들고 전선에 뛰어 나아가서 우리 역성의 피가 압록 두만강?연안에 흘리며 선혈 위에 민족의 자유화가 피고 여성의 평등열매를 맺게 합시다.”
그런데 오광심의 회고에 따르면 광복군에서도 역시 성역할에 따라 여성 광복군이 하는 일이 남성 광복군보다 많았다.
“여자대원이 하는 일이라.… 취사, 통신, 정보수금, 모금 등 남자대원에 비해 더욱 많았습니다. 원시적인 생활이다시피 거친 생활이었기 때문에 모두 고생이 많았지만, 여군의 부담은 더 컸었고 남자군인과 여군, 장교와 사병의 구별 없이 똑같이 일했습니다.”
이처럼 광복군, 의용대·군, 유격대로 활약했던 여성 독립군들의 독립전쟁에서조차 일상적인 성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은 공통적이었다. 또한 김학철의 회고에 드러났듯이 여성 독립군은 누구도 성차별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 독립군은 그것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들의 긍지는 드높았다. 민족의 자유와 여성의 평등을 위해 총과 폭탄을 들고 전선에 뛰어들었다.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