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살피다

민족이 머문 장소, 역사가 깃든 건물

민족이 머문 장소, 역사가 깃든 건물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민족이 머문 장소, 역사가 깃든 건물


사람이 머물던 공간과 사람의 손을 거쳐 탄생된 작품들은 역사적 사건을 거쳐 더욱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36년, 억압 받은 시간만큼 그 시련을 이겨내고자 했던 노력 또한 길었다. 광복을 이룬지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기억되는 중요한 장소, 중요한 시설들이 있다.

           


           

개화의 상징이 된 경인미술관

인사동에 있는 경인미술관은 원래 박영효의 생가였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급진개화파들은 이 집에 모여 급진적인 변혁을 꿈꾸었다. 박영효는 강병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동지 김옥균 역시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며 자력갱생을 위한 산업 부흥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번번이 민씨 척족들에 의해 여러 개혁 정책들이 무마되는 가운데 결국 갑신정변을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김옥균, 홍영식 등 대표적인 급진개화파들의 집 또한 경인미술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곳에 모여 정사를 의논하며 정변을 꿈꿨다.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이 쇄국의 상징이었듯, 경인미술관은 한국 근대사에서 개화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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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미술관

           


           

변절하기 전 친일파의 흔적, 독립문

서재필 등은 1896년 일본에 적대적이며 주로 친미·친러 계열이 주를 이루었던 관료들과 연합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를 창설했다. 초기 독립협회는 주로 언론활동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독립문 역시 이때 만들어졌다.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대신 자주독립을 내외에 표방하는 독립문을 세웠으며 독립관, 독립공원도 들어섰다.

독립문에 새겨진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친일파로 악명을 떨친 이완용의 친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완용은 의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대표적인 정동파 관료였다. 그러나 독립협회 활동으로 좌천된 이후 일제가 득세하는 가운데 친일파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독립문은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원래 자리에서 수십 미터 이전하는 등 수모를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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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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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옛 모습

           


          

열강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성된 석조전

덕수궁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인 석조전이 들어서 있다. 1900년에 착공해 1910년 완공된 건물인데 기둥 모양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식을 차용하는 등 당시에는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건물이었다. 주변에는 러시아 공사관을 비롯하여 서양 열강들의 공사관이 즐비했기 때문에 일제의 위협을 받던 고종의 입장에서 덕수궁을 중건, 개축하는 과정은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석조전의 경우 고종의 광무개혁을 상징하는 건물일 수 있었으나, 지어지던 시기가 고통스러운 망국의 과정이었기 때문에 석조전을 향한 시선이 마냥 낭만적일 수만은 없었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1905년에는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무엇보다 석조전은 1910년 조선이 강제병탄된 해에 완공되면서 본래 건물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광복 이후 1945년 12월에는 이곳에서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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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가슴 벅찼던 만세 현장을 간직한 탑골공원

한국 독립운동사를 다루는 데 있어 빠트릴 수 없는 역사적 공간은 탑골공원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때, 탑골공원 앞에서는 서울 시민을 비롯한 무수한 민중들이 모여 있었고 특히 학생대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크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로써 3·1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4개월간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참여한 만세운동의 진원지는 바로 탑골공원이었다.

한때 파고다공원으로도 불렸던 탑골공원은 본디 절터로, 지금도 공원 안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남아있다. 석탑 바로 옆에 나란히 있는 팔각정은 3·1운동 당시 학생대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가슴 벅찼던 역사적 순간을 간직한 뜻 깊은 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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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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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3·1절 기념식

           


           

선열들의 희생이 여전히 생생한 서대문형무소

독립운동사가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그 역사를 복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소라 하면 서대문형무소를 꼽아도 무리가 없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통감부를 만들었다. 1908년 통감부가 의병탄압을 위해 형무소 시설을 확충하면서 서대문형무소의 비극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유관순과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갇혔던 지하 여자감옥, 강우규가 처형당한 사형장은 현재 모두 서대문형무소에 그대로 남아 있어 그날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이밖에도 서울진공작전을 이끌었던 13도연합의병 총대장 이인영 또한 이곳에서 순국했으며, 안창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상한 채 출옥하여 머지않아 숨을 거두었다. 약 3천 명 정도 수용이 가능한 서대문형무소는 광복 이후에도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의 이름으로 기능해왔다. 1950년대 대표적인 정치인 조봉암이 이곳에 수감되는 등 오랜 독재정권 기간 동안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투옥 당하고 고문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시설이 민주인사들을 억압하는 상징물로 존속되었던 것이다.

무너져가는 나라를 어떻게든 세워보려고 깊이 고민했던 장소, 망국의 현실에서 독립을 위해 피땀 흘린 장소가 있는가 하면, 치욕을 감내하며 고통을 견뎌야 했던 분노 어린 장소 또한 있다. 물론 이런 곳은 대부분 광복 이후 해체되긴 했지만 일제의 간악한 만행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곳인 만큼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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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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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내부

           


           

을씨년스러운 흔적만 남은 조선총독부

일제가 남기고 간 시설 중에 가장 오랜 기간 존속했던 시설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꼽을 수 있다. 대규모 건축 시설이 부족하던 상황에서 서울 중심지에 지어진 조선총독부는 이후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다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1995년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을 통해 완전히 철거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일본’의 일(日)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무엇보다 조선의 법궁이자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된 경복궁의 일부를 철거한 후 바로 앞에 비스듬하게 지어졌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광화문을 옮겼고, 1937년 경복궁 북쪽에 총독 관저를 신설했다. 지형상 두 건축물은 모두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경복궁을 가로막거나 내려 보고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재 독립기념관에는 조선총독부의 철거 부재로 조성한 공원이 있다. 역사교육의 자료로서 부재를 활용하나, 홀대하는 방식으로 전시되어 일제 잔재의 청산과 극복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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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전 조선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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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독립운동가들이 거쳐간 곳 임청각

경북 안동에 위치한 임청각은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고택이자 고성이씨 종택으로 유명한 곳이다. 때문에 독립운동사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생가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으로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상룡은 유학자로서 의병항쟁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인물이다. 시작은 조선왕조의 부흥을 목표로 하였으나, 이후 애국계몽운동을 이끌고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앞장섰다. 계몽운동과 무장투쟁을 병행하는 등 한민족 대동단결을 위해 만주 등지에서 풍찬노숙도 마다하지 않았고, 명망성과 실천성으로 마침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정’을 추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상룡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환골탈태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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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

          

이외에도 우리 민족이 머문 장소에 많은 시설물이 세워졌고, 그것들은 역사적 사건을 거쳐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때문에 독립운동사는 한반도의 수많은 지역과 시설을 가치 있게 만들었다. 독립운동사가 새로운 문화를 만든 것이다.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