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남편과 함께 자정순국한 권성(權姓)
둘,을축년 대홍수는 일제 때문에 일어났다?

하나,남편과 함께 자정순국한 권성(權姓)<BR />둘,을축년 대홍수는 일제 때문에 일어났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글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


남편과 함께 자정순국한 권성(權姓)


2016년 11월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여성은 모두 288명(외국인 포함)이다. 전체 독립유공자 가운데 2% 남짓이니 수적으로는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여성이 오랜 세월 ‘집안’만을 돌보며, 기록물 생산에서 배제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 의미는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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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이 태어난 닭실마을 전경

        

주목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권성
여성들은 의병항쟁으로 포문을 연 뒤, 민족을 위해 세운 뜻을 꺾지 않고 꾸준히 일제에 항거했다. 그 본격적인 첫 장인 국채보상운동을 시작으로 근대교육운동, 3·1운동, 의열투쟁,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지원, 한국광복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투쟁을 펼쳤다. 특히 만주로 망명한 여성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조국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큰 조명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이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남편 이명우와 함께 자정(自靖)순국한 권성(權姓)이다.
권성은 1868년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안동권씨 권양하, 어머니는 풍산김씨 김중태의 딸이다. 권성은 어린 시절 소남(小男)으로 불렸는데, 뒷날 제적등본에 ‘권씨성 부인’이라는 뜻을 가진 ‘권성’으로 적히는 바람에 권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기교를 부리거나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언행을 조심하여 삼가는 사람이었다.
성장하여 17세가 되던 1885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의 이명우와 혼인하였다. 남편은 그녀보다 4살이나 아래였다. 권성은 전통사회의 부덕을 좇아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셨고, 제사와 손님맞이에도 공경과 정성을 다했다. 1894년에는 남편 이명우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진사가 되는 경사를 맞이하기도 했다. 이때 부부가 문중 잔치에 초대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법도 있는 모습을 보여 사람들에게 많은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망국의 아픔과 부모 잃은 슬픔을 겪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듬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 등불처럼 점점 위태로워졌다. 이를 애통하게 여기며 세월을 보내던 남편 이명우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문을 닫고 칩거에 들어갔다. 1910년 나라가 끝내 망했다는 소식과 함께 이만도를 비롯한 척사유림의 자정순국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근심과 분노로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권성은 “상황(上皇; 광무황제)은 아직 무탈하시고, 양친이 살아계시는데 병에 시달려서야 될 일입니까”라며 그를 만류하였다. 이명우는 아내의 말에 따라 때를 기다리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1912년 봄, 권성은 가족과 함께 속리산 아래 충북 보은군 마로면 갈평리로 이사하였다. 남편이 일상을 버리고 은둔 자정(自靖)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고향을 떠났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인으로 여긴 것이 그 이유였다. 이사한지 3년 만인 1915년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 상(喪)을 마치고, 시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계룡산 아래 봉서리(현 대전 유성구 송정동)로 다시 옮겨 갔다. 1918년 11월 5일 시어머니마저 숨을 거두고 머지않아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가 승하하자, 남편 이명우는 머리를 풀고 미음을 먹으며 상을 치렀다. 아침저녁으로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망곡(望哭)하며 지냈다고 한다.


남편과 함께 목숨으로 의(義)를 따르다
1920년 12월 20일(음력), 드디어 광무황제의 상기(喪期)가 끝나는 날이 다가왔다. 남편 이명우는 마침내 자결하리라 결단을 내렸다. 이를 지켜봐온 권성도 남편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자결 하루 전인 12월 19일 저녁, 권성 부부는 자식들을 물리고 유서를 썼다.
이렇게 각각 유서를 남긴 두 사람은 독을 마시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명우가 선택한 길이 ‘충의(忠義)의 길’이었다면 부인 권성의 길 또한 ‘의(義)의 길’이었다. 권성은 ‘충의의 길’과 ‘의부의 길’이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유서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얘들아 너희들을 슬하에 두어 주옥같이 여겨 사랑한 마음 비할 데 없더니, 장래 재미를 보지 못하고 이제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영원히 헤어지니 너의 어린 생각에 원통할 듯 하지만 인륜대의에 어찌하겠느냐? (중략) 너의 시아버지께서 충성과 절의를 지키셔서 목숨을 다하시니 내 어찌 쫓지 아니하겠느냐? 인륜대의에 작은 사정을 다 생각하지 못한다.
- 며느리에게 남긴 유서 중 -


권성의 자정순국과 유서는 많은 의의를 가진다. 남편과 함께 자정순국한 유일한 사례이자, 여성이 한글 유서를 남긴 사례 또한 흔치 않다는 점이다. 권성의 죽음은 직접적인 항일투쟁으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남편의 올곧은 뜻을 함께 좇은 것이니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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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의 유서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을축년 대홍수는 일제 때문에 일어났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홍수가 끊이지 않았다. 역사책을 찾아보면 『삼국사기』에 40여 회, 『고려사』에 104회,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에 176회 등 총 300여 회의 홍수 기록이 있다. 현대에 와서도 홍수는 어김없이 우리나라를 휩쓸었는데, 그 피해 규모를 봤을 때 우리 역사상 가장 큰 홍수로 손꼽히는 것은 을축년 대홍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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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년 대홍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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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대홍수로 물에 잠긴 한반도
1925년 7월부터 두 달 사이에 네 차례에 걸쳐 큰 홍수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한강·임진강·낙동강·금강·만경강·청천강·대동강·압록강·영산강·섬진강 등 전국의 모든 강이 범람하고 논밭과 마을이 물에 잠겼다. 한반도를 강타한 이 대홍수는 피해 규모 또한 엄청났다. 최종 집계된 결과에 따르면 사망자 647명·가옥 유실 6,363호·가옥 붕괴 1만7,045호·가옥 침수 4만6,813호에 이르렀다. 농경지 피해도 유실된 논이 3만2,183단보·밭이 6만7,554단보였다. 피해액은 1억3백만 원으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달했다. 당시 일본 국왕은 대홍수 소식을 듣고 식민통치에 위협을 느꼈는지 위문 사절을 보내오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는 대홍수가 일어나기 전 한강개수계획을 세워, 1초당 2만t의 물을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한강 수위가 그리 상승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그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을축년 대홍수 때 한강 인도교에 1초당 3만2천361t의 물이 흘러내렸고, 예상보다 높아진 12.74m의 최고 수위를 기록한 것이다.
을축년 대홍수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곳은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이었다. 집중호우로 영등포와 용산 제방이 무너지고 한강이 넘쳐 일대가 물에 잠겼다. 용산 철도청 관사는 1층 천장까지 물이 찼고, 경부선 철도 운행은 중단되었다. 뚝섬과 마포 지역도 완전 침수되었고 범람한 물이 서울역 앞까지 들이닥쳤다.
한강변인 송파·잠실·신천·풍납동 일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송파진 마을은 몽땅 물에 떠내려가 거처를 잃은 주민들이 지금의 송파 1동 한양아파트 일대로 이주했다. 이들은 혹독한 물난리를 겪은 뒤 다시는 그런 재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후세에 경각심을 주고자, 1926년 7월 15일 송파리에 소재했던 광주군 중대면사무소에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현재 송파 근린공원에 옮겨져 그날의 재난을 증언하고 있다.


물난리 속에 벌어졌던 몇 가지 일화
당시 두 번째 홍수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영등포에 있던 경성방직공장은 집중호우가 시작되자 7월 15일부터 홍수에 대비해 공장 입구에 모래가마니를 쌓아 둑을 만들었다. 혹시 모를 대피상황을 위해 한강변에 뗏목을 준비해 놓고, 물이 찰 때 잘 찾아갈 수 있도록 공장에서 뗏목이 있는 곳까지 굵은 밧줄을 길게 연결해 놓았다.
장대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다음 날에도 무서운 기세로 쏟아졌다. 결국 한강이 넘쳐 공장 입구에 쌓아둔 둑을 넘고 들어왔다.

7월 17일, 1공장 1층 천장까지 물이 차올랐다. “홍수가 났다. 이제 직원들을 대피시키자.” 공장 2층에 있던 직원들은 공장장의 지시로 대피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영등포경찰서에서 일본인 순사가 찾아와 말했다.
“상부의 지시다. 이 공장의 뗏목을 우리가 징발하겠다.”
알고 보니 영등포경찰서에서 유치장이 물에 잠기자, 구류자들을 급히 옮기는 데 뗏목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결국 직원들은 뗏목을 빼앗기고 꼼짝없이 공장 2층에 갇혀 다음날까지 공포의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을축년 대홍수 때 지금의 서울 강남구의 봉은사에서도 물난리로 떠내려 오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나섰다. 절의 주지인 청호 스님은 절 뒤편 언덕에 올랐다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는 뱃사공을 불러 말했다. “배를 띄워 저 사람들을 구해 주시오. 한 사람당 10원씩 주겠소.” 당시 근로자의 하루 품삯이 2원이었으니, 10원이면 아주 큰돈이었다. 뱃사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강에 배를 띄워 사람들을 구해 주었다. 이 소문은 금세 뱃사공들 사이에 퍼졌다. 몰려온 뱃사공들이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고, 모두 708명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25년 서울에 대홍수가 난 것은 일제가 한강 제방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데다, 한강 중·상류 지역의 나무들을 마구 베어냈기 때문이다. 산에 나무가 없으면 홍수에 취약해지고, 산사태로 인해 하천에 흙이 쌓이면 집중호우 때 쉽게 범람해 제방이 붕괴된다.
을축년 대홍수는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안겼지만 뜻밖의 선물을 주기도 했다.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뒤 우리나라의 중요한 신석기 유적 가운데 하나인 암사동 선사유적지와 백제의 옛 도읍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이 여러 유물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홍수로 우연히 발견된 이 유적들은 신석기시대와 백제시대의 비밀을 밝히는 획기적인 유적들로 평가되고 있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