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의 발자취를 찾아서

한중호조사, 항일을 합작하다

한중호조사, 항일을 합작하다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


한중호조사, 항일을 합작하다


다음으로 창사(長沙)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로 발길을 돌렸다. 창사시 중산로에 위치한 한중호조사 터는 예전 후난(湖南) 자수대학 교실로 사용된 선산학사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자료의 고증이 필요하다.



창사 한중호조사의 역사
<독립신문> 1921년 3월 26일자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부로부터 한국 독립운동의 선전 임무를 담당하고 있던 황영희가 창사시 관민들과 함께 *한중호조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크게 보도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한민보> 1921년 5월 19일자 기사에도 창사시에 한중호조사가 조직되었다는 소식이 크게 실렸다.
창사 한중호조사는 호조사 중에서도 마오쩌둥(毛澤東)이 참여해 발족한 곳으로 한중호조사 중 가장 일찍 설립되어 다른 호조사의 모범이 되었다. 1921년 3월 17일(실제로는 3월 14일)에 설립되었으며, 설립대회에서 명칭·취지·입사조건·조직구도·경비 출처 등의 내용을 포함한 ‘호조사 약칙’을 통과시켰다. ‘한중 양국 국민 간의 감정을 깊이 하고 양국 국민의 사업을 발전’한다는 취지 아래 ‘한중 양국 국민으로서 남녀·종교를 막론하고 본사의 취지에 동의하며, 2명 이상의 회원들의 소개가 있으면 바로 가입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창사 한중호조사의 활동은 양국 국민의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고 서로 단결하여 제국주의, 특히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투쟁하는 업무를 전개하는 데 있어 일정한 사회적 토대와 사상적 토대를 닦았다.
그러나 한중호조사는 계획대로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 원인은 한국의 선전 목적이 반일독립운동에 있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 우리측 목적은 후난성(湖南省)에서 망국의 아픔을 강연하고 반일주의를 선전하며 반일 선전내용을 게재한 신문이나 잡지를 배포하는 것이었다. 종합적으로 볼 때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지와 지원을 얻어 일본에 함께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측 인사들은 사상운동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사상의 전파를 통해 민중을 일으키는 것을 중시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의 정신을 배우는 동시에 한국 지사들의 항일투쟁에 동정과 지지를 표했던 것이다. 이렇듯 양국 지도자들의 행동과 사상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으나, 교류를 지속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양국의 입장은 점차 적극적인 항일로 일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 국민정부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인적·물적으로 지원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뿌연 창사 날씨를 등에 업고 우리 일행은 선산학사를 방문했다. 후난자수대학 옛터, 장사시문물고고연구소 정문을 지나 선산학사로 향했다. 내부에는 창사 한중호조사의 옛터라는 사실을 알리는 동판이나 표지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이곳이 학교 건물의 일부였다는 것 외에 한중호조사와 관련해서 달리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인 지도에서 서원북리를 찾았다.

* 한중호조사: 1921년 중국(중화민국) 각지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중국 민간인들 간에 한중전선·한국독립지원·반제국주의 활동 등을 목적으로 결성된 민간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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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 한중호조사 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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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 한중호조사 결성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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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학사



아직도 찾지 못한 창사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터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인 난징(南京)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난징과 전장(鎮江)을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임시정부는 후난성(湖南省) 창사로 그 청사를 옮기게 되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임시정부가 창사로 옮기게 된 이유와 당시 생활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00여 명의 남녀노유와 청년을 이끌고 사람과 땅이 생소한 후난성 창사에 간 이유는, 단지 다수 식구를 가진 처지에 이곳이 곡식 값이 극히 싼 곳인데다, 장래 홍콩을 통하여 해외와 통신을 계속할 계획 때문이었다. 창사에 선발대를 보내놓고 안심하지 못하였으나 뒤미처 창사에 도착하자 천우신조로 이전부터 친한 장즈중(張治中) 장군이 후난성 주석으로 취임하여, 만사가 순탄하였고 신변도 잘 보호받았다. 우리의 선전 등 공작도 유력하게 진전되었고, 경제방면으로는 이미 난징에서부터 중국 중앙에서 주는 매월 다소의 보조와 그 외 미국 한인교포의 원조도 있었다. 또한 물가가 싼 탓으로 다수 식구의 생활이 고등난민의 자격을 보유케 되었다. 내가 본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한 후 우리 사람을 만나 초면에 인사할 때 외에는 본성명을 내놓고 인사를 못하고 매번 변성명 생활을 계속하였으나, 창사에 도착한 후로는 기탄없이 김구로 행세하였다.


창사에 임시정부가 체류한 기간은 대략 1937년 12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로 보고 있다. 김구는 자신의 본명을 밝힐 정도로 대외적인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나갔다. 정정화의 『장강일기』에는 그의 가족이 창사에 합류한 시점을 1938년 2월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전장에서 창사로 한 번에 이동한 것이 아니라 선발대·본진·후발대로 나누어 이동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임시정부청사가 자리 잡았던 창사시 카이푸취(開福區) 서원북리(西園北里)로 향했다. 난무팅(南木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서원북리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간혹 보였다. 2002년 조사 당시 독립기념관 답사단이 임시정부청사로 추정한 서원북리 6호는 현재로서는 정확한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라고 할 수 없다. 문헌자료나 회고록 등에도 보이지 않고 현지 주민들도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광복군 신순호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건물은 여러 가족들이 거주할 만큼 규모가 컸으며 8호 2층을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했고, 16호는 청년공작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현지 전문가들은 신순호 여사의 증언에 의문을 제기했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만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념판 또는 동판 부착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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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북리(西園北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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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북리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옛터 추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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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북리 거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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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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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의 『장강일기』



임공재 학예사는 서원북리 전체를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입구에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서원북리가 일행을 이끌었다. 골목으로 들어가 나이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임시정부청사의 위치를 탐문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예전에 한국인이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곳 골목 입구에 동판을 부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만 개진한 채, 우리 일행은 발길을 돌려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으로 향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