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혹은 거짓
암울했던 시기, 희망의 홈런을 날리다
영화 <YMCA 야구단>

글 편집실
암울했던 시기, 희망의 홈런을 날리다
영화 <YMCA 야구단>
감독: 김현석
주연: 송강호, 김혜수
개봉일: 2002년 10월 3일
1900년대 초 일제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시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민중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스포츠, 특히 ‘야구’였다. 영화 <YMCA 야구단>은 초기 한국 야구의 발전과정을 코믹하게 다루는 동시에, 일제강점기 속에서 야구로 희망을 꿈꿨던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Q. 우리나라 야구의 역사는 언제부터였을까?
영화의 배경은 갑오개혁으로 신분제와 과거제도가 막 폐지된 조선의 한양이다. 글공부보다는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호창(송강호)은 야구를 하는 신여성 정림(김혜수)과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신문물의 상징’인 야구의 매력에 푹 빠졌고, 급기야 조선 최초의 야구단에 몸담게 된다.
<YMCA 야구단>은 실제로 존재했던 황성YMCA야구단을 소재로 하고 있다. 세계적인 기독교 평신도 운동단체인 기독교청년회,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는 우리나라에 야구를 비롯해 농구·스케이트·배구 등 주요 현대 스포츠 종목을 처음 들여오면서 한국 근대화 여정에 큰 역할을 했다.
Q. 그 시절 우리나라 야구의 인기는 어땠나?
YMCA야구단은 연전연승을 기록하며 최강의 팀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그 무렵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본군에게 연습장을 빼앗길 처지에 놓인다. 이때 투수 대현(김주혁)은 일본 유학 때 알고 지낸 일본인 장교와 조우하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 성남구락부와 경기를 하게 된다.
선교사 질레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매달 6~9회의 야구 경기가 치러지고 심지어 12월 한겨울에도 경기를 치를 정도로 한국 야구의 인기는 대단했다. 황성YMCA야구단은 국내에 있는 일본팀과 미국 선교사팀을 연파하며 국내 야구를 평정했다. 특히 일본과의 경기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비장한 각오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1912년에는 최초로 일본 원정에 나서 야구 명문인 와세다대학팀과 친선경기를 가진 바 있는데, 당시 일본 언론들은 우리 야구단의 모습을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와 같았다’고 묘사했다.


황성YMCA야구단 경기 모습(이길용기념사업회)
Q. 실제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선수는 누구인가?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우리나라 1세대 야구선수이자 체육인이다. 그의 체육계 활동은 1912년 황성YMCA야구단에서 주장을 맡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상하이한인체육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푸단대학교(复旦大學校) 명예교수로서 체육부를 담당해 대학 축구팀을 이끌고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순방하는 등 체육에 대한 애정이 컸다.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1932년 가출옥해서는 조선체육회 이사, 서울육상경기연맹 회장 등 각종 체육단체 임원을 맡았다. 여운형은 한국 스포츠계에 수많은 족적을 남기며 오늘날 한국 스포츠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여운형(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Q. 국민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한 야구?
서울YMCA는 한말 개화파 청년들과 미국 선교사들을 주축으로 1903년 10월 28일 설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모태다. 이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던 1905년 선교사 질레트(P.L.Gillett)의 지도로 황성YMCA야구단이 결성되었다. 황성YMCA가 주축이 되어 활발하게 전개된 체육활동은 청년들의 능력 배양과 함께 일제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일제는 105인 사건 등으로 탄압을 시작해 1913년 황성YMCA를 해체시켰다. 그러나 체육 및 교육활동으로 고취된 독립의식은 1919년 2·8 독립선언과 3·1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야구를 포함한 스포츠는 나라가 힘없던 시기, 우리 민족의 가슴 속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지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