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참상을 알린 참된 언론인

일제강점기 참상을 알린 참된 언론인

글 학예실


일제강점기 참상을 알린 참된 언론인
장덕준(張德俊, 1892. 6. 25~1920)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장덕준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언론인으로서 일제강점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최초의 순직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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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창간에 참여

추송(秋松) 장덕준은 1892년 6월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나무리의 한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아일보> 창간 당시 주필이자 후에 정치가로 활동했던 장덕수가 그의 동생이다. 장덕준은 명신중학교에 진학하여 1911년 졸업하였으며 그 후 모교 교사로 2년간 재직하였다. 1914년에는 평양일일신문사에 입사하여 조만식 등 평양의 명사들과 만남을 가졌다. 이듬해 1915년에는 일본 유학을 떠나 세이소쿠(正則)예비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동시에 재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유학생들이 발행한 잡지 『학지광(學之光)』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장덕준은 이 시기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와 같은 자유주의 지식인과 교류하였고, 주변 유학생들에게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귀국 후 신문을 발행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한편 3·1운동 이후 민간신문 발행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그는 <동아일보> 창간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0년 4월 창간 당시 논설주간은 장덕준의 동생인 장덕수였고, 장덕준은 논설반원·통신부장·조사부장을 겸하였다. 그는 창간 다음날인 1920년 4월 2일부터 13일까지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 여론을 비평함’이라는 논설을 실어 3·1운동을 왜곡한 일본 여론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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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준 초상화(1964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제작, 국가보훈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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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준(1920년, 국가보훈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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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창간호(1920년 4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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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 실린 장덕준 기고문(1920년)

           

사생결단의 기자 정신

장덕준은 지병인 폐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치며 <동아일보> 기자 생활을 계속해나갔다. 특히 1920년 여름에는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의원단을 취재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특파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안창호와 함께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 포터를 만나 한국의 실정을 설명하였고, 의원단장인 스몰을 인터뷰해 기사로 실었다.

한편 같은 해 10월 <동아일보>가 조선총독부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당한 가운데, 간도에서는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에 패한 일본군이 그 보복으로 한국 동포를 무차별 학살한 간도참변이 일어났다. 당시 장덕준은 폐결핵으로 혈담을 토하는 상태였지만 취재를 위해 혈혈단신 만주로 떠났다. 그러나 “빨간 핏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내온 뒤로 곧 실종되고 말았다. 당시 나이 29세였다.

장덕준이 실종된지 10년이 지난 1930년 4월 1일, <동아일보>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며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순직자로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한 기자는 “의에 대한 용기, 봉공(奉公)의 정신, 이 두 가지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끼친 데 대해서 나는 씨를 과거의 모든 의인보다도 별달리 사모코저 하는 것이다”라고 그를 추모했다. 정부는 장덕준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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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준의 미국의원단장 인터뷰 기사(<동아일보> 1920년 8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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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방문한 미국의원단(<동아일보> 1920년 8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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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참변 당시 학살당한 한국 동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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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준 추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