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미주 한인
여성독립운동 단체의
결성

미주 한인 여성독립운동 단체의 결성
Ⅳ. 3·1운동 이후 재미 한인 사회의 변화 ⑦
3·1운동 발발 직후 독립운동의 뜨거운 열기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전 미주 한인사회로 확산되었다. 미주 한인 여성들도 조직적인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립운동 단체들을 결성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북미 한인 여성들의 단체 결성
미국 본토에서 결성된 최초의 여성 단체는 장인환·전명운 의거 직후인 1908년 3월 말경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상항 한국부인회다. 대동보국회의 김미리사, 장경 부인, 문경호 부인, 이민식 부인 등이 공립협회 소속의 여성들과 함께 결성하였다. 설립 목적은 도덕 실천, 국민 자격 확충, 자선사업에 두었다. 이를 위하여 한인 아동에 대한 한글교육과 한인사회의 단결을 도모하는 데 앞장섰다.
장인환·전명운 의거를 계기로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가 통합된 힘으로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할 때 구국활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하여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 소속의 여성들이 만든 것이 한국부인회다. 따라서 한국부인회는 특정 단체의 주의(主義)를 대변한다거나 일방의 정치적 신념에 치우치지 않는 여성단체로 출발하였다. 한국부인회는 1911년 4월 샌프란시스코 내 고아들을 돕는 활동을 펼친 것 외 1919년까지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북미 한인사회에 여성 단체의 결성을 다시 촉구한 때는 1914년 7월이다. 『신한민보』에 게재한 주수근 여사의 유서 〈외양에 나온 대한 부인의 직분〉에 따르면 한인 여성들은 첫째, 남자를 도덕적으로 인도하고, 둘째, 자녀를 조국정신으로 교육하며, 셋째, 부인회의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여성단체의 필요성을 제기할 정도로 그동안 재미 한인 여성들의 활동은 미약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있었기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1914년 새크라멘토에서 대한부인회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새크라멘토 대한부인회는 1917년 3월 맨티카에서 한국부인전도회가 발기될 때 적극 지원하였다. 한편 1917년 11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여성들은 대한부인친애회를 발기하고 그 해 12월 20일 조직을 완성하였다. 설립 취지는 “정의를 돈수하며 지덕을 계발한다” 하여 여성들의 수양에 목적을 두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의 결성
1919년 3월 9일 3·1운동 소식이 미주 한인사회에 전파되자 전 미주 한인들의 독립 열망은 한층 고조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독립의연금 모금운동을 더욱 활성화하는 한편 선전외교활동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한인 여성들은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가한 소녀가 일본군의 군도에 팔이 잘렸다는 소문(The Washington Post 1919년 3월 15일자 기사)에 큰 충격을 받고 비분강개하며 독립의 성공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때마침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3월 13일부터 23일까지 독립의연금 모금활동을 위하여 캘리포니아 각 지역을 순방할 때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한인 여성들에게 ‘부인애국단’의 이름으로 활동하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3·1운동 직후 미국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메리다에서 독립운동을 표방한 여성 단체들이 잇달아 결성되었다. 다뉴바의 한인 여성들은 3월 23일부터 30일까지 단체 설립을 논의한 후 신한부인회(회장 강원신)를 결성하였다. 멕시코 메리다의 한인 여성들은 6월 15일 첫 모임을 갖고 대한부인애국동맹단(단장 김신경)을 결성하였다. 6월 23일 대한부인애국동맹단은 임시의장 김마리안나의 명의로 「공고」 제1호를 공포하고, 독립의 대사업을 성공하는 그날까지 힘을 다해 돕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일찍이 대한부인친애회를 결성한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여성들은 3·1운동 이후 나아갈 구체적인 독립운동의 방침을 제정하였다. 즉 1919년 4월 1일부터 일본 물화의 배척, 독립의연금 납부, 일주일에 두 번(화·금) 고기 없는 날 실시, 자기 손으로 의복 세척, 저축한 돈을 독립군에 응원하는 것으로 의결하였다.
각지에서 여성 단체들의 결성과 활동이 활발해지자 중앙총회는 1919년 4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신한민보』를 통해 한인 여성 단체들이 우선 단체 이름이라도 일치해 활동하면 좋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면서 일전에 안창호가 제안한 ‘부인애국단’의 이름을 재차 제안하였다. 또 각지에 분산되어 활동하기보다 중앙기관을 만들어 활동할 것과 하와이의 여성 단체와의 교류도 제안하였다.
1919년 8월 2일 샌프란시스코, 새크라멘토, 다뉴바, 로스앤젤레스의 여성 대표들은 대동단결의 취지 하에 대한여자애국단을 결성하기로 하고 중앙총회의 인준을 요청하였다. 8월 5일 중앙총회의 공식 인준을 받은 대한여자애국단은 그 해 9월 말 각 지부를 통할하는 총부(초대 총단장 김혜원)를 조직하고 북미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여성독립운동 단체로 입지를 다졌다.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1932. 2. 22.)
하와이 한인 여성 단체와 대한부인구제회 결성
하와이 한인사회에 여성 단체의 이름이 처음으로 지면에 드러난 때는 1909년 12월부터 1910년 3월까지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돕기 위하여 전 하와이 한인들이 의연금을 모금할 때다. 이때 신명부인회는 68.60달러, 교육부인회는 10달러를 의연하였다. 신명부인회는 오아후섬 호놀룰루에서 1900년대 후반 경 결성된 것으로 보이고, 가와이섬 골로아에 지방회를 결성할 정도로 활발하였다. 부인교육회도 신명부인회와 비슷한 시기에 오아후섬에서 결성되었으나 세부 지역은 미상이다.
두 여성 단체가 결성된 이후 1913년 4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대한인부인회가 설립되었다. 기존의 여성 단체들을 통합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대한인부인회는 하와이 각 지역에 지부를 설립하였다. 국어교육 장려, 일제 용품 배척, 교회와 사회단체 후원, 재난동포의 구제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19년 국내 3·1운동의 소식이 하와이 한인사회에 전파되자 3월 15일 대한인부인회 주최로 41명의 여성들이 모인 가운데 부인공동회를 개최하고 대한인부인적십자회(회장 송매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당일 구휼금으로 238.98달러를 모금하였는데, 이는 3·1운동으로 인해 핍박받고 있는 국내 한인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1919년 3월 29일 대한공화국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하와이 여성들은 4월 1일 제2차 부인공동회를 개최하고 대동단결의 기치 하에 대한부인국민구제회를 조직하기로 의결하였다. 설립 목적은 독립운동으로 고통당하는 국내의 동족을 구원하고 새로 수립된 임시정부를 협조하는 데 두었다. 4월 4일 공식 임원(초대 회장 손마리아)을 발표하였고 참가한 회원 수는 260여 명에 달하였다.
대한부인국민구제회는 1919년 6월 대한부인구제회로 이름을 변경하고 3·1 독립선언서를 ‘대한독립선언서’란 이름으로 제작하여 장당 35센트에 판매하였다. 3·1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판매한 수익금을 독립의연금과 구휼금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해 11월 국내 동포 구휼금 1,000달러를 모금하여 본국에 송금한 대한부인구제회는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 단체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1930년 7월 동지회가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동지미포대회를 계기로 동지회와 하와이 교민단 간의 분쟁이 일어난 후 대한부인구제회는 교민단측(후에 대한인국민회측) 대한부인구제회와 동지회측 대한부인구제회로 양분되었다.